회색빛 하늘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며 12월이 점등된다. 이 고요하고 쓸쓸한 적요함은 밤까지 이어진다.

 
화촉을 밝히는 신랑신부 예식을 보고 와서인지 적요 속 그들의 웃음이 여전히 가지런하다.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꽃과 축복의 인사를 건네는 하객들 틈에 비 내리는 거리 풍경이 배어있다.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영미 시에 끼친 영향으로 ‘시인의 시인’으로 불리는 이미지즘(imagism)과 보티시즘(vorticism)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시에 도입한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즈라 파운드의 시 ‘지하철역에서’란 시를 떠올린 것도 내리는 양털 촉감 비의 느낌 때문이란 구실을 붙인다.
 
군중 속에서 마주친 얼굴
젖은, 검은 가지에 핀 벚꽃
 
시인이 파리 콩코드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데 열차가 도착했는지 군중이 우루루 몰려나왔을 때의 영감을 회화적 기법으로 담은 두 구의 시다.
 
마침 예식장 옆은 장례식장이 있고 역이 있다.
 
시작과 일상의 흐름과 마지막이 단편적이고 일반적인, 강처럼 흐르는 생의 습지에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시각적 배경은 좀 암울하더라도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어 빗소리는 실로폰 소리처럼 맑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부와 신랑은 서로를 위한 선언문 십계조항을 약속한다.
변하지 않고 행복한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지만 이미 인생이란 틀은 복잡하고 미묘한 짜임을 가지고 있으니 이후는 그 자신들 몫으로 남긴다.
 
내일은 이 비가 눈으로 온다고 했으니, 조선조 다산(茶山)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남긴 글을 느껴보고자 한다.
 
눈 내리는 밤에 달 밝은 하늘을 대하게 되면 마음이
문득 그처럼 맑아지고 봄바람의 온화한 기운을 접하게 
되면 뜻이 또한 저절로 부드러워진다. 천지의 조화와
사람의 마음이 한데 어울려 조금의 틈도 없게 되는 것이다.
 
겨울로 가는 비를 꼭꼭 심으면 비 꽃이 피어 꿈속에 스밀 것이다.
 
자연을 품은 동화에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사람이 바람을 건너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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