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이 집중된 황제든 왕이든 지도자가 나라를 망치는 이유는 크게 몇 개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여색에 빠지는 경우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그렇게 등장한다. 역사의 수많은 교훈에도 불구하고 많은 황제들은 주지육림에 빠져 백성들의 어려움을 멀리하다가 백성들의 난이나 궁중 쿠데타로 자신이 죽거나 혹은 나라가 아예 망해버리곤 했다. 두 번째는 외척의 득세로 인한 궁중 내부의 투쟁으로 국력이 쇠약해 멸망하는 경우이다. 셋째로는 바로 환관(宦官)들로 인해 조정이 어지러워지고 이들의 손에서 황제가 놀아나면서 국가가 멸망하는 경우이다. 진나라도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짧은 시간만에 국가가 멸망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긴 시간동안 유지되었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했던 한(漢)나라도 외척과 환관의 득세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환관은 중국이나 한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경우에는 이집트, 바빌로니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시기에도 있었다. 특히 클레오파트라의 근위대장 포티누스도 환관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로마 제국에도 환관제도가 있었고 이들은 정관만을 끊어냈다고 한다. 반면 페르시아의 경우에는 특히 흑인을 환관으로 두는 경우가 많았고 이때는 주로 성기를 통째로 잘라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은나라때 이미 포로들을 잡아 환관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를 궁형이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환관의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명나라 시기에는 무려 10만명의 환관이 있었다. 이들을 화자(火者)라고도 했는데 두 개의 점은 남성의 고환을 상징했다. 
 
한국에서는 내시라고 불렀는데, 원래 내시의 의미는 왕을 보필하는 일종의 관직이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 말기부터 내시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환관으로 채워졌다. 그래서 내시는 남성의 상징이 없는 사람들로 불리우게 되었다. 중국의 환관은 음경과 고환을 둘 다 잘라냈고 한국에서는 고환만 잘라냈다. 그리고 잘라진 부분은 따로 소금에 절여 보관했는데 환관이 죽으면 이를 다시 꿰메 장사를 지냈다. 미리 은퇴한 경우에는 그 항아리를 가지고 조상앞에 가서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은 완전한 인간체임을 포기한 대신 대부분의 경우 권력과 재물에 탐닉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에는 단순히 황궁안에서 잡일을 하고 황제 옆에서 시중을 드는 일종의 노비에 지나지 않았으나 24시간 황제를 보필하면서 점차 신뢰를 쌓아갔고 나중에는 자신들이 황제를 폐하거나 옹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환관이 모두 다 악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종이를 만든 채륜이나 명나라때 유명한 대원정을 했던 정화 등도 환관이었다. 한국의 역사에서 연산군에게 죽은 김처선도 충신으로 이름을 남겼다. 
 
진나라를 멸망하게 한 조고라는 환관이 있다면 한(漢)나라는 십상시(十常侍)라는 10명의 환관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어린 황제였던 영제를 손에 넣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황제는 이들의 우두머리인 장양(張讓)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나의 부패한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환관들은 기본적으로 매관매직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모든 관직에 가격을 매겨 자리를 사고 팔았다. 
 
이렇게 능력없이 관직을 산 사람들은 자신의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 자신이 다스리던 지역의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수탈했다. 수탈당한 백성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삼국지 초반에 등장하는 황건적(黃巾賊)의 난이다. 한나라의 십상시들은 심지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장군들에게 조차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제거하기도 하였다. 
 
이후 십상시에 대항하던 대장군 하진을 제거하고 이에 원소와 원술 등이 병사를 이끌고 궁에 쳐들어가 환관을 포함한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왕궁에서 살해되었다. 일명 십상시의 난이다. 한나라는 혼란에 빠졌으며 이름뿐인 황제로 전락하여 한나라의 명운이 바람앞의 촛불이 되었다. 그럼에도 역사는 흘러가고 난세는 새로운 영웅들을 기다리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가 열리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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