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한(漢)나라를 건국한지 수십년이 지나면서 한나라의 국력은 날로 발전하였다. 건국 후 약 60년이 지나 일곱 번째 황제가 등극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유철(劉徹)이라는 한무제였다. 그는 많은 황제들 중 정복자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는데 한족들의 영토 중 가장 넓게 확장하였다.

 
기원전 141년에 황제에 올랐을 때 16세의 나이였다. 처음에는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고 이후 기원전 135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가 권력을 잡고나서 첫 번째 행한 일은 각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을 튼튼히 하는 일이었다. 당시 유방과 같이 건국을 도왔던 개국공신들의 후손들에게 나누어 준 땅과 관직을 몰수하고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비록 유방이 나라를 세웠지만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무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지방 제후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사용하는 화폐를 만들어 통용시켜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고, 소금과 철, 술 제조 등도 자율적으로 하고 있었다. 한무제는 지방제후의 힘이 클수록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 통치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통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드디어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도입하였는데 이때부터 공자의 유교사상이 중국의 지배사상이 되었다. 유교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나 ‘장유유서(長幼有序)’등의 사상이 훗날 한국에도 도입되었다. 한국은 중국보다 더 유교스러운 국가가 되었고 상하관념과 계급, 계층, 심지어는 언어의 사용에도 이러한 사상이 녹아들게 되었다.
 
이렇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경제력과 군사력을 발전시킨 한무제는 한족, 즉 농경민족의 가장 두려운 적이었던 흉노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먼저 장건이라는 부하를 서역에 있는 대월국으로 보내 흉노족을 같이 공격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다. 장건은 무제의 명을 받고 서쪽으로 가다가 흉노에게 수차례 잡히고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그가 돌아온 후 무제에게 상황을 보고하였고 그가 다녀온 길은 한무제가 정복한 길과 이어져 실크로드의 초석이 되었다. 
 
한무제는 우선 한족들을 괴롭혀온 흉노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지금의 감숙성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있는데 이를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한다. 이 길을 따라 당시 대장군이던 곽거병을 보내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을 점령하고 이곳에 하서4군을 설치하여 중앙아시아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자신이 점령한 서쪽 지역에 이주민을 보내 땅을 분배하고 농사를 짓도록 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남쪽으로는 이전 월나라의 후손들이 있던 민월과 동월을 흡수하고 지금의 베트남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남월국(南越國)을 멸망시켰다. 베트남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중국에 저항하였으나 송나라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운남성과 귀주성 쪽에도 군대를 보내 6군을 설치하였다. 
 
동쪽으로는 당시 왕검성을 수도로 하고 있던 고조선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조선은 한반도에서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고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무제는 육로와 해로로 육군과 수군을 파견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요동반도와 한반도에 이어지는 거대한 영토의 강한 국가였던 고조선은 불행하게도 외부의 침입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멸망하게 된다. 이틈을 이용하여 한나라는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을 함락하고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정복자 한무제의 영토확장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게 되었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훗날 한나라가 어려워지고 삼국으로 분열되는 씨앗이 그의 무리한 영토 욕심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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