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돈을 인민폐(RMB)라고 하는데 지폐로는 100원에서 1원짜리까지 있다. 그 지폐에는 액수의 크기에 상관없이 오직 한 인물만 인쇄되어 있으며 그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毛澤東)이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중국의 2000년간 많은 황제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대단한 황제로 한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이야기 하였다.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기원전 256년이라는 설과 247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으며 황제가 된지 12년만인 기원전 195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아주 평범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일하기를 싫어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천덕꾸러기였다.
 
전국 7웅 시기에 위나라의 신릉군이라는 사람의 문객으로 들어가 생활하였고 후에 신릉군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 이장 정도의 작은 벼슬을 하였다. 비록 놀기 좋아하는 유방이었으나 멀리서 진시황의 행렬을 보고 “대장부가 저정도는 되어야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뜻을 키우기 시작했다. 
 
유방의 부인은 여씨(呂氏)인데 훗날 여태후로 정권을 쥐락 펴락했던 여인이다. 여씨의 아버지가 잔치를 하면서 1천전 이하의 축하금을 내는 사람은 마당에 자리를 하고, 그 이상의 사람들만 대청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자 유방은 나는 1만전을 낼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대청으로 올라갔다. 이때 관상을 볼 줄 알았던  여씨의 아버지는 유방이 남들과 다른 비범한 관상임을 알고 자신을 딸을 유방에게 시집보냈다.
 
유방이 이장의 신분으로 죄수들을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축조하는데 데리고 가는 임무를 맡았는데, 도중에 많은 죄수들이 다 도망가버렸다. 이에 유방은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도망을 가시오, 나도 멀리 도망을 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중 몇 명은 유방을 따라 도망을 쳤는데 이들이 나중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개국 공신이 되었다. 
 
진시황이 죽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여파가 유방의 고향인 패현에도 밀어닥쳤다. 당시 패현의 관리였던 소하와 조삼은 현령에게 사람들을 모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권고했고 밖에 있던 유방도 패현으로 돌아오라고 권고했다. 이때 유방은 수백명의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 되어 있었다. 패현으로 돌아와 자신을 의심하던 현령을 죽이고 병력을 모았는데 거의 만명에 가까웠다.
 
유방은 주위의 마을들을 공격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으며 진나라에 본격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천하의 책사로 알려진 장량(張良)을 만나 자신의 참모로 삼음으로서 그의 능력은 배가 되었다. 당시 진나라 토벌의 가장 큰 세력이었던 항량(項梁)에게 귀의하였고, 그의 능력을 높게 본 항량은 유방에게 5천명의 병사를 더 내어주어 자신을 따르도록 하였다.
 
유방은 항량의 밑에서 조카였던 항우(項羽)와 함께 대장군이 되어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 와중에 항량은 전사하고, 새롭게 초나라의 왕으로 세운 회왕이 유방과 항우에게 각자 나누어 진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한발 앞서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 도착한 유방에게 진나라의 3대 왕인 자영은 백마를 타고 항복하면서 옥새를 바쳤다. 이로서 15년간의 진나라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와 유방간에 알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힘이 약했던 유방은 거짓으로 항우에게 옥새를 바치고 굴복하는척 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지켰고 이후 자만에 빠져있던 항우를 제거하고 한나라를 건국했다 지금 중국인은 모두 56개의 민족이 있는데 그 중 한족(漢族)이 92%에 달한다. 바로 한족이란 이름이 한(漢)나라에서 유래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방은 자신의 통치를 위해 처음으로 공자(孔子)를 되살려 중국의 통치에 유교를 끌어들인 이후 유교는 중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방은 중국 역사상 평민으로서 황제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는데, 바로 평민이었기 때문에 평민의 아픔과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고 이용하여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백성을 하늘로 아는 것, 이것이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을 현재의 지도자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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