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주윤발, 성룡, 유덕화 등이 출연하는 홍콩영화가 전성기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잘생긴 배우로 장국영을 빼놓을 수 없었다. 그 장국영이 출연한 작품중에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경극을 주제로 한 영화가 흥행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경극인 패왕별희는 진시황이 죽고 난 후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項羽)와 그가 사랑했던 여인, 우희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표현하였다. 

 
진시황의 폭정과 간신들의 권력투쟁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두 명의 인물이 있었는데 서초패왕이라고 불리는 항우와 그 반대 세력에 유방(劉邦)이 있었다. 
 
항우는 원래 초나라 장군 집안 출신으로 그의 용감함과 힘은 산을 뽑을 만큼 강하다고 표현되었다. 반면 유방은 동네 백수처럼 별 볼일 없는 인물로 어쩌다 반란군의 대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고향이 패현이란 곳이어서 그를 패공이라고 불렀다. 이제 새로운 중국의 역사는 이 두 영웅담을 통해 기록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삼국지와 같이 유명한 소설이 초한지인데, 바로 항우와 유방의 대결을 묘사한 것이다. 
 
항우는 초나라의 왕의 후손을 회왕으로 추대하였고 기원전 207년, 즉 진시황이 죽은 지 3년만에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으로 진격했다. 진격하는 과정에 항우는 적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면서 공격했는데, 이를 안 도시들은 죽기 살기로 항우에게 대항하였다. 반면 유방은 항복하는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지역을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방이 손쉽게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할 수 있었고, 당시 3대 황제였던 자영은 항복하였고 유방이 이를 살려주었다. 연이어 도착한 항우는 이를 보고 크게 분개하여 자영을 죽이고 아방궁과 궁궐을 불태웠다. 이때 유방의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한 항우의 책사 범증이 반드시 유방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유방을 초대하여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홍문이라는 곳에서 죽이려고 하였는데 유방의 책사였던 장량이 백정 출신이던 번쾌를 내세워 암살계획을 막을 수 있었다. 유방은 항우에게 업드려 사죄하고 옥새를 항우에게 바치는 등의 노력으로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가장 군사력이 강했던 항우는 4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있었고 유방은 10만명의 군사력에 불과했다. 이제 적들이 없어졌다고 판단한 항우는 자신이 세웠던 회왕을 죽이고 스스로 서초패왕이 되어 양자강 주변의 9군의 땅을 차지하고 18명의 제후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다시금 주나라의 봉건제를 도입한 것이다. 이때 유방은 한왕(漢王)으로 임명하고 보잘 것 없는 땅을 나누어 주었다. 
 
유방은 항우가 회왕을 죽인 이후 많은 군신들과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는 것을 틈타 항우를 토벌하겠다며 군사를 모았다. 그러나 번번히 항우의 군대에게 패배를 거듭하기 일쑤였다. 한편 항우의 밑에 있던 장수 중 한신(韓信)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자 그를 떠나 유방과 합류하게 되고 그 세력균형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유방의 책사였던 장량의 반간계(反間計)로 뛰어난 장수들이 하나 둘씩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고 결국 가장 믿을 수 있었던 심복이며 책사였던 범증도 항우를 떠나 죽게 되자 유방의 세력이 더 월등해졌다. 항우와 유방의 마지막 전투는 해하라는 곳에서 있었는데 항우는 모든 병사를 잃고 그의 옆에는 애첩 우희만 남게 되었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천하를 움켜쥔 유방은 부하들에게 자신이 승리한 이유를 물었다. 부하들이 이런 저런 이유를 설명하자, 유방은 다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 이유를 말했다. 바로 ‘삼불여(三不如)’라고 하는 것인데, 자신의 지혜는 장량보다 못하고, 양식과 보급을 확보하는 것은 소하보다 못하고, 전쟁에서의 승리는 한신 보다 못하다라고 하였다. 자신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항우는 인재를 쓸 줄 몰랐으나 나는 이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일의 승패는 결국 ‘인사가 만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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