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영화를 보면 황제 앞에 도열한 신하들은 황제가 세운 왕조가 천년 만년 가기를 기원하면서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친다. 그러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역사에서 천년을 유지한 왕조는 찾아볼 수 없다.천년왕국과 영원불멸의 신기루를 쫓던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순행중에 객사하고 간신들의 권력투쟁으로 그의 시신이 썩어 가도록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화무십일홍,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란 옛말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철칙이다. 

천년왕국을 세운 진시황의 진나라가 왜 이렇게 단명했을까?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한 후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적 평가에 사로잡혀있었다. 자신은 실수하거나 잘못되지 않는다는 무오류의 오류에 빠져 자만하게 되었고 마음과 귀를 닫았다. 그는 점차 포악하게 변했으며 감히 신하들이 간언을 할 수 없게되자 충신들은 그 곁을 떠나고 간신들만 남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장남이었던 부소가 간언을 하였으나 오히려 진시황에게 쫓겨 북쪽의 변경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백성들은 진시황의 가혹한 정치에 신음 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수십만명이 동원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중국의 동쪽 만리장성의 끝인 산해관에 가면 맹강녀(孟姜女)의 고사(故事)가 전해진다. 맹강녀의 남편이 만리장성 축조에 끌려가 결국 죽게 되었는데 그를 찾으러 온 맹강녀가 남편의 죽음을 알자 통곡을 하였다. 이때 만리장성이 열리면서 남편을 만나게 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백성들은 평소에는 조용한 호수와 같지만 일단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마치 큰 태풍이 분 것처럼 바람이 일어 배를 엎는 것처럼 진시황의 폭정에 곳곳에서 반란과 폭동의 조짐이 있었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처럼 백성들의 지지를 잃은 왕조는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멸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진시황이 죽고 궁궐내에서는 본격적인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고와 이사이다. 조고는 진시황이 죽자 자신과 관계가 좋던 호해를 황제로 세우고 원래 황제가 되어야 할 부소에게는 자살하도록 명령하였다. 진시황은 더운 7월에 죽었는데 9월이 되어서야 장례를 치루었고 호해는 2세 황제가 되었다. 
 
진시황의 죽음이 전해지자 농민이었던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부역에 끌려가던 중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라고 하면서 수십만명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했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통일 이전의 나라들이 다시금 반란을 일으켜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나라의 안팎이 혼란에 빠졌음에도 진나라 왕조는 권력 투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조고와 함께 황제를 바꿔치기 했던 승상 이사는 황제에게 아방궁의 축조를 중단하고 백성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고의 말만 듣던 호해는 오히려 이사를 나무라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조고는 이사와 그의 아들이 모반했다는 누명을 씌어 처형해버리고 권력을 독점했다. 
 
자신에게 도전할 모든 세력을 제거한 조고는 이제 황제도 자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사슴 한 마리를 황제에게 바치고 말이라고 했다. 황제는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 제 정신인가라고 물었는데, 오히려 신하들은 사슴을 말이라고 하고 황제를 농락했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지록위마(指鹿爲馬)이다. 
 
권력을 장악한 조고는 결국 호해를 자살하도록 하였고 새로운 황제로 부소의 아들인 자영을 세웠다. 자영은 병을 핑계로 조고가 자신의 거처로 오도록 하여 제거하였으며 이후 조고의 삼족을 멸하였다. 
 
지도자의 오만함과 폭정, 간신들의 전횡, 백성들의 원망이 합쳐지자 거대한 중국의 첫 통일국가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지 겨우 15년이 지났을 때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영원할 것 같다는 오만함은 세우기는 어려워도 무너지기는 이렇게 쉽다는 것이 역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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