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상징하는 동물이라면 용(龍)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용은 중국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황제를 상징하기도 했다. 구름을 뚫고 하늘로 승천하는 전설 속의 용을 자세히 보면 발톱의 수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황제가 입는 용포에 새겨진 용은 발톱이 다섯 개이고 제후들은 4개 혹은 3개의 발톱을 가진 용의 상징을 사용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은 감히 용을 자신의 상징으로 사용할 수 없다. 중국은 바로 용의 발톱 숫자처럼 모든 권력이 황제에 집중된 계급사회가 형성되었다. 
 
모든 권력의 황제에 대한 집중과 중앙집권의 2천년간의 중국의 정치제도가 바로 진시황을 시작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왕조가 멸망과 생성을 끊임없이 이루어졌으나 진시황때 만들어진 중앙집권체제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유지되었고, 지금은 중국 공산당이 모든 권력의 정점(頂點)에서 중국을 통치하고 있다. 
 
진시황은 기원전 259년에 태어났고 13살이 되었을 때 진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때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권력은 여불위(呂不韋)가 장악하고 있었다. 여불위는 원래 상인이었으나 당시 인질로 다른 나라에 있던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투자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여불위가 진시황의 어머니와 사통(私通)하여 진시황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불위는 권력을 손에 넣었으나 진시황이 성장함에 따라 불안감을 느끼고 자신과 사통하던 진시황의 모친인 태후에게 가짜 내시인 노애를 소개하고 자신은 그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러는 사이 진시황은 성장하여 21세가 되던 해에 정식으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자 노애는 불안감을 느끼고 이듬해에 옥새를 훔쳐 군대를 동원하여 진시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진시황은 미리 이를 간파하고 궁궐 곳곳에 자신의 친위대를 매복시켰다가 노애를 잡았다. 진시황은 노애를 4마리의 말에 묶어 사지를 찢는 거열형으로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노애가 낳은 아들 둘도 죽여버렸다. 이후 여불위를 지금의 사천으로 유배보냈으나 여불위는 스스로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자신의 주변을 정리한 진시황은 이제 전국 7웅을 하나씩 멸망시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호칭을 왕이 아닌 ‘삼황오제’에서 황제라는 글자를 따와 ‘황제’라고 칭하도록 하였다. 이후 중국은 황제의 국가가 되어 청나라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황제가 된 진시황은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였고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땅을 모두 몰수하여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전국을 46개의 군(君)으로 나누었고 그 관리의 직함을 군수(郡守)라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군수라고 부르는 호칭이 이때부터 전해져 온 것이다. 중앙집권제도는 관료제를 중심으로 이전의 귀족의 세습제를 대신함으로서 자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들을 제거했다. 
 
또한 통일적 통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문자를 통일했다. 동시에 북방 오랑캐들의 침략을 막기위해 만리장성을 수리하고 건설하였으며 마차가 다니는 길의 폭도 전국적으로 통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이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 하여도 통일된 중국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진시황의 정책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막강한 제국의 황제였던 진시황은 나이가 들면서 ‘불로장생’에 대한 망상을 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그 당시 도사(道士)들에게 현혹되기도 하였다. 훗날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한 후 의학이나 과학과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는 분서와 자신에게 반대하는 학자들과 도사들을 산채로 땅에 묻어버리는 갱유를 했는데 이를 합쳐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한다.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진시황도 과로와 긴 순행길에 병을 얻어 사구(沙丘)라고 하는 곳에서 객사(客死)하였고, 그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진나라 왕실은 또 다시 권력투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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