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랍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가지고 있던 물과 식량이 다 떨어졌다. 그대로 있다가는 사막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몇 날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결사적으로 걸었다. 마침내 작은 샘터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얼마 전에 누군가 천막을 쳤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는 혹시 먹을 것이라도 찾을 요량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그는 어떤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는데, 쿠키처럼 뭔가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한 움큼 꺼내 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값비싼 큰 진주알들이었다. 그 사람은 손에 한 움큼 쥐었던 진주들을 내던져버리며 외쳤다.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결국, 그 아랍 사람은 사막에서 죽어 갔다. 이 사람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시원한 물과 빵 한 조각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진주알을 발견하고 횡재했다고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절박한 상황에서 값비싼 진주라도 소용이 없었다. 
 
성경에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그해 엄청난 풍작을 이루었다. 보관 창고를 크게 지을 궁리를 하며 몇 해는 놀고먹어도 되겠다고 기뻐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 그러나 그날 밤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이것이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많은 사람이 돈이 명예가 권세가 대단한 것인 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심지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고 자기 목숨을 잃기도 한다. 젊어 고생에 이룬 것들을 막상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들도 많고,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것 같았지만 그 말로가 불행한 경우도 많다. 과연 무엇을 위한 돈, 명예 권력이었던가? 그리고 그것을 누린들 얼마나 누리며 살 것인가? 짧은 인생을 살면서 과연 무엇을 남기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영화 곡성의 명대사처럼, 과연 무엇이 중한가? 
 
우리는 누구라도 날 받아놓고 사는 사형수와 같다. 20년 아니면 30년 혹은 50년? 사람마다 언젠가는 결국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우리는 예전에 비해 참 많은 것을 누리고 산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이 훨씬 고급스러워졌다. 최첨단의 시대에 온갖 편리함을 갖추며 사는데 예전보다 행복하다고 느끼기 어렵다. 그런 이면에는 물질만능주의의 폐단, 남들만큼 더 많이 가져야 하고 자기절제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태도 한 몫 한다. 깊은 생각을 힘들어하는 시대이다. 두꺼운 책은 잘 안 팔린다. 인생을 좀 더 멀리, 깊게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중요하지만, 그 너머에 우리의 마음과 영적인 문제에 대한 부요함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짐 엘리엇(Jim Elliot)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He is no fool who gives what he cannot keep to gain that which he cannot l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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