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는 비록 국력은 약했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한(韓)나라를 병합한 후 숙적이었던 조나라까지 수년에 걸친 전쟁을 통해 멸망시켜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중국 통일이라는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확장 전쟁을 시도한다. 

 
진나라의 다음 목표는 남쪽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던 초나라였다. 그러나 초나라로 가기 위해선 그 길목에 있던 위(魏)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위나라는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합종이 깨어지고 어떤 나라도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3개월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위의 마지막 왕은 투항을 하고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진은 이를 거절하고 사형시켜버렸다. 
 
위나라를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파죽지세로 남쪽의 초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초나라는 당시 중국 남방의 대국으로 지금의 하남성 서부, 산동의 남쪽, 호북, 호남과 강서, 안휘, 강소, 절강을 자신의 영토로 하고 있었다. 
 
진시황은 초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어전회의를 개최하고 초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병력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당시 촉망받던 이신이라는 젊은 장군에게 필요한 병력을 묻자 20만명이면 족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노장군인 왕전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자, 왕전은 60만명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진시황은 왕전에게 장군은 이제 늙어서 겁이 많아졌다고 하면서 이신의 편을 들었다. 왕전은 다음날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혈기 왕성한 이신은 20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드디서 남방의 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초나라의 장군이었던 항연은 진나라 군대를 함정에 몰아넣고 역공을 하였으며 결국 이신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대패하였다. 진의 중국 통일 중에서 맛본 가장 큰 패배였다. 
 
마음이 급해진 진시황은 다시금 왕전에게 군사를 줄테니 초나라를 공격하라고 했으나 왕전은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진시황은 직접 왕전을 찾아가 부탁하면서 필요한 사항을 말하라고 했다. 왕전은 자신이 정말 나가야 한다면 60만명의 군대는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고, 이번에는 진시황도 그의 말을 따랐다. 
 
6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와 대치하던 왕전은 싸우지 않고 장기전을 택했다. 왜냐하면 진나라의 보급물자가 훨씬 풍족했기 때문에 장기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한편 초나라의 장군 항연도 지구전을 펼치면서 진나라가 먼저 싸움을 걸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실시했다. 그러나 초나라의 왕은 항연에게 싸울 것을 재촉했고 결국 임금의 잘못된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항연은 전사하고 말았다. 항연이 없는 초나라는 오합지졸로 변했고 수도는 함락되고 왕은 포로가 되어 진나라에 합병되었다.
 
남쪽의 초를 통일한 진나라는 다시 그 군사를 북쪽의 연나라로 돌렸다. 원래 연나라의 태자 단은 자객 형가(荊軻)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진의 공격에 연나라의 왕은 태자 단의 목을 베어 진시황에게 바치고 화해를 청했다. 진시황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하여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로 통합했다. 
 
이제 남은 나라는 산동성을 근거지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제나라 뿐이었다. 제나라는 진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어 진나라와 직접적인 전쟁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할 때 조나라가 제나라에게 군량미를 도와달라고 청한적이 있다. 이때 제나라의 주자라는 신하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즉, 순망치한(脣亡齒寒)을 이야기 하면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무능한 왕과 간신들에 의해 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결국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제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향락과 사치에 빠진 왕과 진나라의 뇌물에 녹아있던 대신들은 진나라의 공격에 어쩔줄 몰라했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던 왕은 결국 투항했고 이후 포로로 잡혀 굶어 죽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자와 도태되는 자의 차이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국시대이고 또한 진나라의 통일 과정이었다. 지도자의 우둔함과 신하의 탐욕하에 백성들은 신음하였으며 또 나라를 잃는 설움의 몫도 모두 백성의 몫이 되었다. 지도자는 나라를 흥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으니 어떤 지도자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중국 역사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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