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꽃이 저녁을 환히 밝히던 여름 끝 날이었다. 하루 해가 어두워지면 집 옆에 있는 동부공원을 돌아다니는 일이 숨 쉬는 듯 자연스런 운동이 되었다. 수돗가 근처에서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다.

 
“저기, 아줌마! 이 개의 주인이 되어보실래요?” 
 
초등 사오학년쯤 되었을까,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빛나는 남자아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턴가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았어요. 그런데 이 개가 저만 졸졸 따라 다녀요. 집이 없나 봐요.”
 
집을 잃었거나, 주인에게 버려졌거나다. 개가 주인에게 버려지면 그 버려진 자리에서 끝까지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개는 기다리다가 지쳐 순전한 아이들을 따라다니기로 한 건가?
 
“아줌마! 제가 이름을 달아 주었어요. ‘사랑’이라고. 저 만치 달아나며 ‘사랑아!’라고 부르면 제 목소리를 듣고 막 뛰어와요”
 
어느새 이 거리에서 둘은 친구가 되었구나!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 개의 주인이 되냐구! 마지못해 덥석 키우는 것도 아니구, 마당도 없는 아파트 안에서, 저렇게 덩치가 큰 개를 키우라고. 나보고? 
 
유유히 저녁산책을 나왔다가 갈등거리를 안았다.
 
“키우고 싶다는 네 마음을 믿고 키워 봐.”
 
아이들 중 하나가 거들며 말했다. 곧 소년이 내게 개의 목줄을 부탁했고 나는 또 망설였다.
 
어른이 된 나는 망설이는 데는 명수다. 목줄을 구해다 주면 어쩔건데? 이 아이의 부모와 이야기가 되어야 우선인데 말이다. 나는 유기견 보호소로 연락해 주겠다고 하자 아이는 안락사를 시킬지도 모른다고 하며 그 보호소도 믿기 어렵다고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잠시 동안에도 흰 개는 아이를 무척 따르며 머리를 부빈다. 방랑하는 희망이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는 소년의 푸르디 푸른 근심을, 슬픈 생명들의 뒷 모습을 내게 보이고 길고도 어둡게 멀어져갔다. 나는 좋은 수를 내지 못하는 나의 답답함이 괴로웠다. 
 
어릴 적에, 송아지와 나는 워낭소리의 울림만큼 친하였던 기억이 있다. 인간과 짐승을 이름 짓는 생명의 고통에 작은 연민이 일고 있다. 내일 그들을 만나면 흰 개를 덥석 안아 집으로 데리고 올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 가면서 물질적 반응에 더욱 열심인 생명들은, 생명에 무딘 날로 돈과 일을 쫓아가고 사랑스런 아이들도 자주 시들어간다. 
 
깊은 밤, 아까 공원에서 만난 그 아이들의 목소리가 귀뚜라미 울음에 뒤섞여 나는 다시 몸을 돌아 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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