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인천 어느 교회의 부목사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그 교회에는 회사 사장의 부인도 있었고, 알콜중독자 남편을 두고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쁜 가난한 부인도 있었다. 하루는 가난한 여 성도가 필자를 찾아와 푸념을 늘어놓았다. 누구는 먹고 살려고 매일 아등바등 거리며 겨우 사는데, 누구는 명품 백에다 고급 자가용을 끌고 한가롭게 다닌다면서 그것이 상처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필자는 그 성도를 몇 마디 말로 위로하고 보낸 다음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별 생각 없이 자유롭게 누리는 것들이 다른 누구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반면에 그 부유한 여 성도에게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필자는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내가 마음껏 누리며 살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가 아니라, 상대방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지지 않도록 상황에 맞게 조금 절제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나보다 더 누리며 사는 사람을 죄악시해서도 안 된다. 가난은 언제나 정의롭고 부는 반대로 불의하다고 시각은 잘못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덕의 문제이다. 합법적으로 내가 벌어 내가 쓰는데 누가 뭐라고 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허비해버리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누릴 수 없는 너무 절실한 필요일 수도 있음을 아는 성숙함도 필요하다. 
 
성경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권고한다(고전 10:23-24). 내게 아무 거리낌이 없고 그렇게 할 자유가 있어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거나 상처를 입히는 이유가 된다면 절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합법’(合法)이 모두 ‘합덕’(合德)인 것은 아니다.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덕스럽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합법적 행위를 가장한 편법과 탈법으로 요리조리 법망을 빠져나가서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일들도 많이 있다. 
 
요즘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검증 문제로 온통 시끄럽다. 특히 거액의 사모펀드 투자문제나 자녀의 학교 진학과 관련한 문제들이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그것의 사실여부와 법 위반 소지에 대한 것은 엄밀히 따져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이것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특혜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경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 사람만의 문제일까? 몰라서 그렇지 그 후보자를 날카롭게 비난하는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 가운데 이런 기득권층의 특혜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내가 가진 돈과 권력과 정보들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데 비난할 수 없다. 그런 자리에 있음으로 얻게 되는 특혜들을 무조건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다만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에 걸 맞는 사회적 기여와 역할에 충실한가를 묻게 된다.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해!’로 결론 내리지 않도록, ‘합법’으로 만족하지 않고 ‘덕’을 끼치는지를 생각할 줄 아는 지도층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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