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이었던 둘째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서울 고대 안암병원 바로 앞 대로에서였다. 우리는 횡단보도의 녹색신호가 점멸하고 있어서, 서둘러 가면 건널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중에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었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돌아가자고 소리쳤지만 아이는 들은 체 하지 않고 마저 뛰어가면 될 줄 알고 더 빠르게 건너편으로 뛰어갔다. 쓸데없는 모험심이었다.  

 
횡단보도 앞 차선에 멈췄다가 이제 막 출발하려는 버스는 아이를 보고 멈칫했지만, 비어있던 끝 차선으로 진행해오던 차는 버스에 가려 뛰어오는 아이를 못보고 그대로 받아버린 것이다. 필자는 길 건너에서 차에 받혀 쿵 소리와 함께 튕겨나가는 광경을 그대로 보아야 했다. 
 
부모로서의 부주의함에 대한 심한 자책은 일단 뒤로 하고, 급히 길을 건너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도 많이 놀랐지만 외상은 없었고, 즉시 건너편 병원 응급실로 가서 여러 검사를 했다. 결국 근육과 인대에 충격이 있었을 것이라는 소견으로 몇 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런데 목사인 필자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다. 교통사고를 목격한 그 순간에는 저절로 나오는 소리, “아! 하나님, 제발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 그저 아무 일 없기만을 수없이 되뇌며 달려갔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지나자 화가 났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거죠? 저에게 왜 이러세요? 가뜩이나 힘든데.” 
 
필자가 그때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많이 지치고 낙심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곤고한 중에 이런 일마저 벌어졌다는 생각에, 마치 눈의 무게를 견디다 조금 더 내린 눈에 주저 앉아버린 나뭇가지처럼 감사보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그 일을 문득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꼭 1년이 지난 때였다. 혼자 운전 중에 갑자기 1년 전 그 일이 떠올랐다. 그 사고로 아이는 더 큰 상해를 당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는가?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는데, 사고를 당한 아이는 건강하게 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회개와 감사가 복받쳐 올라왔다. 운전을 하면서 혼자 눈물어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혼자 한 부흥회였다. 머리로는 인정하고 감사했지만 그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진정한 감사가 되기까지 꼬박 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의 마음이 굳어지고 낙심이 되면 다른 정서(情緖)도 문제가 생긴다. 좋은 것을 보아도 좋아 보이지 않고 재미난 것을 보아도 재미있지 않다. 감사한 것을 감사로 느끼지 못한다. 여유가 없고 마음이 거칠어진다. 그것을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낙심하고 싶어 낙심하는 게 아니다. 상황이, 현실이 우리를 고통으로 내몰아 갈 때가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런 한숨 이면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있다. 지금 맞닥트린 현실을 다 이해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는 실망하고 낙심할지라도, 때론 한숨과 불평과 원망의 언어를 쏟아놓는다 해도 결국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게 만드는 무엇을 가졌다. 신자는 그 모든 것들이 결코 하나님께 감추어 진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삶에서 부닥치는 모든 위기적 상황은 우리 실존이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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