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글의 제목은 얼마 전 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책의 이름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어감은 상대방이 나를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 수많은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가족이나 친구, 직장동료, 그리고 각종 모임과 공동체들에서 수많은 관계들이 파생된다. 나의 선택의 여지가 별로 개입될 수 없었던 관계들도 있고, 나의 선택에 의해 형성된 관계들도 있다. 성년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 생겨난 관계들이 많다. 

 
앞에서 언급한 책의 저자는 여러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이용당한 사람들의 여러 사례들을 언급한다. 나는 진실한 우정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순전히 나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매우 불쾌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 사람만 그런가? 나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도 사람들을 만날 때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계산해 보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내게 큰 도움이 될 만한 대상에게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곤 한다. 결국 사회생활이란 서로 주고 받는 관계이며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즉 현실에 기초한 관계 맺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내용에 동의하지 않지만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상식처럼 들었던 말이 있다. “질 나쁜 친구들하고 사귀지 마라, 되도록 공부 잘 하는 애들하고 어울려라” 등등. 어른이 되어서 우리는 나의 신분에 걸 맞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려 애쓴다. ‘인맥관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떤가? 상대방이 나보다 잘 나고, 성공한 사람이라면 자기보다 못난 나를 만나야 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 결국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때로 내가 좀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이익이 될 수도 있다. 달리 표현하자만 누군가는 나를 이용했고 나도 누군가를 이용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유치환시인은 ‘행복’이란 시에서,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고독한 섬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에 목말라 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는 김춘수의 시어도 생각난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위해서는 손해 볼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의 황금률로 불리는 유명한 말이 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마태복음 7장 12절). 역지사지의 정신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자기에게 못해준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불평은 하면서, 정작 상대방에게 내가 못해준 배려는 잊고 살기 쉽다. 
 
한번쯤 내가 맺고 있는 주변의 관계들을 생각해보자. 나에게 너는,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곰곰이 물어보자. 조금 내가 밑지고 사는 것 같은가?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있기까지의 나를 위해 누군가는 손해보고 이익으로만 나를 대하지 않았다는 것도 한번쯤 기억해 보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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