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많은 기적 중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신 놀라운 사건이다. 기적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야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모든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창조주의 능력이라면 가능하다.

  이 사건이 얼마나 인상이 깊고 놀라운 일이었든지, 성경의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문제는 그 다음날이었다. 전날 놀라운 기적을 맛본 이들이 또 다시 그 기적의 현장으로 몰려왔다.
 

  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곳에 없었다. 열심히 수소문을 해서 예수님의 행방을 찾았다. 갈릴리 바다 건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배를 타고 예수님의 일행을 만났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아이고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데요. 한참 찾았네요”하면서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26).

  조금 풀어 설명하면,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 아니요?”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찾아온 군중들에게 또 다른 기적이 아닌, 딱딱한 설교를 장시간 하셨다. 기적을 맛보려고 찾아왔던 사람들은 이 말씀은 어렵다고 투덜거리면서 떠나갔다.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왔다가 다 떠나버린 텅 빈들판에 예수님과 소수의 제자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에 제자 베드로가 용감하게 나서서 말한다. “영생을 주는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저희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요한복음 6:69).

  그 제자들이 떠나지 않은 것은 예수님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믿음에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에만 눈이 팔렸지, 그런 기적을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든든한 구원자임을 알고 믿게 하려고 기적을 베푸신 것인데, 예수님에게 시선이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적에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이 없다면 언제라도 예수님께 등을 돌렸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런 기적신앙으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보이는 것 너머에 더 중요한 것까지를 보지 못하고 마는 안타까운 일이다.
 

  손가락과 달’이라는 불가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달은 안쳐다보고 손가락에만 주목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땅을 살면서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에 집중하다가,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살 때가 있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다행히 급하게 뛰어 타서 안도하는 순간, 사실은 내가 갈 목적지와는 전혀 다른 버스였을 때의 황망함이 인생 전체를 산 결론이었다면 어떠할까? 늘 우리에게는 매일 처리해야 할 분주한 일상이 있다.

  그런데 바쁘고 분주하게 살다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아무리 갈 길
이 바빠도 차에 기름이 없이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무엇을 위해 나는 지금 바쁜가, 어디를 향해 가는 인생인가를 깨닫는 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지혜이다.

  평생 익살과 언어재치로 시대를 풍미했던 노벨상 작가였던 버나드 쇼(1856-1950)의 묘비명은, 죽음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단면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 지금껏 죽음이 나를 비켜가긴 했지만, 결국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삶과 죽음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결코 안 되는 진리가 무엇인가? 바쁘게 사는 중에 한번쯤 돌아보는 기회가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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