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 문인협회
평택시 문인협회
  하루하루 내 귀에 나지막이 들리는 빛과 소리를 잡아채어 종이에 쓴다. 순간순간 일상의 느낌표나 소리를 줍는다. 지금은 시월 하순, 수확과 이삭줍기가 끝나간다.

  이삭, 꽃이 피었던 데서 열매가 달리는 아름다운 이름, 여름의 뜨거운 숨결과 폭풍우를 견뎌낸 결과물을 딴다. 추수가 끝나고 떨어진 열매들, 다 캐내지 못한 땅콩과 감자밭에서는 여인들의 이삭 줍는 모습이 보인다.

  화가 밀레의 ‘이삭줍기’는 가을을 완성한다. 들판에 높다랗게 쌓인 짚더미가 있는 농촌풍경과 벼 이삭을 줍느라 허리를 굽힌 수건 쓴 여인들의 모습을 본다. 한 알의 곡식이 소중한 것을, 소박하고 신선한 농부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농부는 이삭을 흘리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는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 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위하여 남겨두라,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을 것을 다시 따지 말고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위하여 남겨두어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인류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나눔과 사회적 쇄신을 생활속에서 자연스레 실천해온 것이다.

  어릴 적에 엄마와 가을산에 올라 도토리 낮은 나무에서 갸름하니 뾰족한 도토리를 따기도 하고 줍기도 하였다. 날이 스산하니 춥고 그림자 지는 산에서 엄마와 같이 도토리를 주울 때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다만 춥기만 했다.

  엄마를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밤마실을 가거나 도시로 나갈 때마다 엄마는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다.

  가을빛은 내 영혼 속으로 잠시 왔다가 놀다 간다. 단풍 짙은 오대산의 콸콸 계곡 물소리, 뚝뚝 끊어지며 들리는 늦가을 풀벌레 소리, 가을햇빛 속에서 사물놀이패들의 신명난 몸짓과 태평소 소리는 스산한 마음에 율동을 켠다.

  그 옆에서 세 살 아기가 춤추는 모양을 보았다. 나무로 짠 원형의 넓은 바닥에서 맨발로 하늘거린다.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눈코입이 환한 미소와 귀여운 얼굴빛이며, 발끝의 리듬과 회전이 눈이 부셔 아기 태양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주홍빛 나무에서 감을 따는 마을 할아버지는 장대 끝에 망을 늘이고 하나하나 감을 딴다. 남기고 거두어들이고 저장을 한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인생을, 사랑의 열매를 수확한다. 곧 지고 말 가을 볕 속에 가을볕이 아깝다고 외친 시인의 시를 읽는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 정진규의 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중에서

초록연필의 사슥거림이 내 뇌를 만지며 쓴다. 나도 모르게 쓰여지는 문장이 나를 서서히 일어서게 한다.

가을햇볕 속으로.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