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 전 광림수도원에서 있었던 목회자 세미나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날의 주제는 경청, 잘듣는 일이었는데요. 순서를 맡은 강사님이 먼저 두명씩 짝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최근에 기뻤던 일슬펐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나누라고 하십니다. 조건이 하나 있는데, 얘기를 나누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뒤로 넘기라는 겁니다. 판단을 하지 말고 그냥 들으라는 거지요. 그리고서 한 20분쯤 지났습니다. 제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우리 옆 조를 보니까 여자 목사님 두 분이 손을 잡고 막 울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그 날 처음 만난 분들이 손을 붙들고 울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참별일도 다 있다 싶었고, 감정이 풍부한 분들이라고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말씀을 들으니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얘기를 듣다 보니까, 뭘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니까 그 사람의 삶이 자신 안으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얘기가 내 얘기가 되고, 상대방이 삶이 내 삶이 되고 자신도 모르게 서로 붙들고 울면서 이야기를 나눴다는 겁니다.

  아직도 저는 그런 지경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그렇게 울면서 오심(五心)이 여심(汝心)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없습니다.  그만큼 더 많이 듣는 훈련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저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보다 판단하는 일에 빠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편이십니까? 성경은 남을 판단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 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장1절) 판단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크리노’입니다. ‘크리노’는 정죄 심판이라는 의미가 더 분명한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은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또 그 사람들은 남을 정죄하는 그 정죄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의미겠지요.

  어디를 구분할 것 없이 오늘 이땅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내로남불’이라고 하더군요.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도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손가락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마구 정죄하긴 하는데, 정작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는 데에는 빠르고, 나를 성찰하는 데에는 참 게으릅니다. 그렇다면 정죄와 권면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죄 인지 아니면 권면인지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증오심이 남아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그 말 안에 증오가 있다면 결국 그 증오는 상대방을 죄인으로 낙인 찍고 심판하게 합니다. 만약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면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 사람이 나보다 잘 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자나 듣는 자의 삶에서 회개의 열매가 맺힌다면 그건 권면입니다. 아무리 옳은 논리로도 그 말이 정죄 판단 심판이라면 남는 건 회개의 열매가 아니라, 분노와 적개심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의 말은 판단하는 말입니까? 사랑의 권면입니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죄하고 재단하는 날선 이야기들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서로 판단하지 맙시다. 사랑하며 삽시다.

 
 
한 명 준
서정교회 담임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연세대학교 세인폴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현재 서정감리교회 담임목사로서
감신대와 평택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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