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이 지나고 춘분이 다가오고 있다. 겨울 내 굳은 논밭을 첫 번째로 갈아엎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온실에서는 모판에 씨앗을 심거나 모종을 들어 들판에 옮겨 심어야한다. 밖으로 떨어져 나온 모종은 햇빛과 비바람 아래 그대로 정해 아주 심는다.  아주심기는 더 이상 옮겨 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토’를 보았다.  나만의 사계절을 겪으며 이웃들과 ‘작은 숲’을 이루어 ‘쉼’을 만나게 해 주는 정갈함을 주는 영상이었다. 인생에 무슨 수확이 있을까마는 생명에 열매를 얻으려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기다려야한다. 추수할 인생의 가을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고향을 떠난 가난한 도시 청춘이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손수 경작을 하여 그 열매로 자신의 입에 밥을 먹인다. 사계절을 담은 자연의 알갱이들을 따서 콩국수와 수제비와 막걸리를 만들어 먹인다. 자신을 위해 자기를 먹이니 몸은 고단해도 생활은 담백하다.

  일찍 고향을 떠난 나는 단번에 심어지지 않았다. 유목 성향이 많은 나는 아주심기가 곤란하다. 고향의 사과밭을 떠났지만 한 도시에서 이리저리, 정처 할 수 없는 세상살이였다. 그렇다고 그 어릴 때 고향 부근에서 아주심기가 되었다면 지금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을 해본다.

  나의 유목생활은 시간의 자유를 고려해 일을 선택하기 시작한 데 있다. 일과 여행에 두 눈을 맞추느라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 식물의 가지와 방향은 하늘과 햇빛 쪽으로 자란다. 가지가 자라는 동안 뿌리도 땅속 깊이 뻗어 자리를 잡는다. 육체는 떠돌아도 정신의 아주심기는 가능하다.

  내가 배고플 때 남의 배고픔을 읽으면 치료가 된다. 내가 벼랑에서 자빠졌을 때 내 주위에 자빠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하지 않겠는가?  떠돌아도 내 마음의 집은 안에서 계속 지어지고 있다.

  달팽이는 제 집을 등에 지고 간다. 나는 안에다가 펜을 장착하고 봄비와 봄바람이 하는 일을 본다.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문명이 가고 새로운 것이 오고 있다.

  만물이 평등한 새로움이 ‘미풍’을 데려와 내 안에 ‘아주심기’를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단단하지 않은, ‘싶어요’, ‘같아요’를 여의고 결단하는 서늘한 의식이 있다.

  스스로 되어가는 아주 심기는 뿌리로 돌아가는 일이고, 고향으로 가는 여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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