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후반 고구려의 전성기를 장식한 장수왕의 노도와 같은 남진정책에 떠밀려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한강유역을 포기하고 남으로 내려와 지금의 공주인 웅진에 새로운 수도의 터를 잡는다. 이후 다시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공주는 64년간 백제의 수도 노릇을 하게 된다. 공주는 비단결 같은 금강을 앞으로 두르고 나지막한 산들로 첩첩이 둘러싸인 지형이다. 몸을 낮추고 적을 방어하며 힘을 기르기에는 더없이 좋은 요새와 같은 땅이기도 하다. 백제는 이곳의 많은 산들에 성을 쌓고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힘을 길렀다. 그러한 백제의 비원을 담고 있는 유적의 하나가 바로 산성동에 남아있는 백제의 성‘공산성’이다.
공산성은 공주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 중의 하나다. 공주를 가로지르는 금강을 건너기 위해 금강교를 건너다보면 나지막한 공산(해발 110미터)의 외곽을 따라 이어지는 긴 성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공산성 성곽의 길이는 2.4km이며 계곡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둘러싼‘포곡식 산성’으로 구분된다.
백제의 두 번째 수도 지키던 산성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전성기를 장식한 장수왕의 노도와 같은 남진정책에 떠밀려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남으로 내려와 지금의 공주인 웅진에 새로운 수도의 터를 잡는다.
이후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공주는 64년간 백제의 수도 노릇을 하게 된다. 공주는 비단결 같은 금강을 앞으로 두르고 나지막한 산들로 첩첩이 둘러싸인 지형이다. 몸을 낮추고 적을 방어하며 힘을 기르기에는 더없이 좋은 요새와 같은 땅이기도 하다. 백제는 이곳의 많은 산들에 성을 쌓고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힘을 길렀다. 그러한 백제의 비원을 담고 있는 유적의 하나가 바로 산성동에 남아있는 백제의 성‘공산성’이다.
공산성은 공주를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 중의 하나다. 공주를 가로지르는 금강을 건너기 위해 금강교를 건너다보면 나지막한 공산(해발 110미터)의 외곽을 따라 이어지는긴 성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공산성 성곽의 길이는 2.4km이며 계곡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둘러싼‘포곡식 산성’으로 구분된다.
신비의 왕국 백제의 미스터리를 간직한 왕릉
1971년 7월 충남 공주시 송산리에서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된 6세기 백제 무령왕릉. 이곳에선 왕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 금동신발, 금동귀고리와 목걸이 등 2,900여 점에 달하는 귀중한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백제 고고학의 최대 성과라고 할 만큼 중요한 발굴이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시대의 왕릉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곳으로 현재 진짜 왕릉은 영구 보호조치 되었고 그대로 본뜬 모형 왕릉이 전시되어 관람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라도 고분군을 둘러보기에 앞서 고분군 모형전시관에 반드시 방문할 것을 권한다. 모형전시관에는 무령왕릉을 비롯해 송산리의 주요 고분인 5호와 6호 고분의 내부를 고스란히 재현해 놓았다. 연꽃 무늬가 새겨진 정교한 벽돌 무덤방에 들어서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백제 중흥의 토대를 닦은 무령왕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을 비롯한 웅진백제가 남긴 유물과 역사, 문화를 보여주는 곳. 전시실은 무령왕릉실과 웅진문화실로 이루어졌다. 2개의 실내 전시실로 구성되어 무령왕릉 출토유물 108종, 2,900여 점과 충남지역 출토유물 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국보 14건 19점, 보물 4점 등 중요유물 약 1천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가 주변국들과 활발히 교류했던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국가였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무령왕과 왕비를 모신 목관은 일본산 금송을 재료로 했으며 무덤 입구를 수호하는 신비의 동물 진묘수(鎭墓獸)와 도자기 등은 당대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양나라(남조)와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