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무능한 선조와 부패한 관리들은 자기들만 살기에 급급해 백성들을 버리고 신의주까지 피신하게 된다. 그리고 자처해서 사대를 청했던 조선이기에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게 된다. 한국의 역사에서 고구려를 시작으로 고려에 이르기까지 형식적으로는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맺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독
당파싸움과 권력투쟁에 몰두했던 무능한 임금을 가진 조선은 결국 일본의 침략을 허락하고 말았다. 특히 권문세가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농장을 확대하고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혔고 왕실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끝이 없었다. 한편 일본은 그동안의 전란을 종식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여 그 세력을 해외로 팽창하고자 하였다. 기록에 따
한 나라의 정부가 무능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타국의 침략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아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는 생명이고 둘째는 재산이며, 셋째는 명예이다.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는 것이 전쟁이다. 위화도 회군을 하여 이성계가 조선을 세
중국에서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변화되는 격동의 시기에 한반도에도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고 있었다. 몽골족이 지배했던 원나라는 한족에 대한 탄압과 식민정치로 반란과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주원장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는데 그 원나라 말엽, 한반도에서도 몽골족에 적대적이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의 왕인 공민왕은 원나라에 반대하는 자주적인 개혁정치를
조카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영락제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내부적으로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한편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실시하여 명나라의 토대를 완성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북쪽의 몽골의 잔여세력과 여진족을 토벌하였고 티베트와 네팔,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아프
명나라는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1368년에서 청나라에게 멸망한 1644년간 약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당시의 경제력은 한나라와 당나라와 같이 세계에서 최고로 발전한 국가였다. 중국의 역사는 유목민과 한족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이어져 왔는데, 명나라는 몽골제국을 몰아내고 한족이 다시 중원을 차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를 긴 호흡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는 만리장성은 달나라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구조물로도 유명하며, 중국 정부는 그 길이가 단순한 직선거리는 2,700킬로미터 이지만 그 지선까지 포함하면 8,851킬로미터로에 달한다고 발표하고 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요녕성의 산해관에서 서쪽으로는 감숙성의 가욕관까지 이어져 있고 그 축조 시기는 진나라때부터 따져도 20여개의 왕
원나라 말기 세상은 더욱 뒤숭숭해졌다. 원나라 황실은 내부에서 권력 투쟁으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몽골족 통치에 신음하던 한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코로나로 세계가 고통받고 있듯이 당시 유럽과 중국도 페스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때 통계를 보면 전 세계 인구의 20%가 사망했다고 하니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중국의 무협소설을 쓴 작가중 김용이란 사람이 있다. 그에 대한 평가로 “중국인이 있는 곳에 그의 작품이 있고, 중국인이 모인 곳에서는 그의 작품을 이야기한다”라고 할 만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이다. 그가 쓴 소설이 공식적으로 팔린 것만 1억부 이상이고 실제 복사까지 하면 모든 중국인이 한번쯤은 읽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이나 홍
징기스칸의 몽골이 파죽지세로 중앙아시아와 심지어는 유럽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동쪽에 있는 고려도 수십년동안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던 고려도 몽골에 대한 저항을 중지하고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어 평화를 획득했다. 다른 유목국가처럼 만약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고려는 비록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었으나 독립
징기스칸과 그 후예들이 역사에 남을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당시 고려에게는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40년간 그리고 수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냈던 역사를 보면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얼마나 강한 민족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한족의 송나라는 금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송나라도 초기에는 맹공이라는 장수가
우리는 역사적으로 몇 개의 제국과 그 제국을 건설했던 인물들을 기억한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은 지중해의 동서남북을 정벌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었다. 서양인들에게 있어 그는 하나의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를 이어 받아 로마제국이 형성되었고 로마는 서양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그 영향이 크게 이어져 오고 있다. 한편 동양에서는 만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한족의 역사라기 보다는 만리장성 이북에서 중원으로 쳐들어온 유목민들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이들은 번번히 중원을 침략하였고 한족들을 아래에 두고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문약했던 송나라를 유린하였으며, 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초기에 송나라와 결탁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숨돌릴
중원을 넘어 북쪽에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 선비족,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의 호칭으로 불리우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말갈족과 만주족, 그리고 여진족은 거의 같은 민족이었다. 흉노족과 돌궐족은 현재 중국의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이
송나라가 약해지고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워 그 기세가 등등하고 있었다. 거란족이 916년에 요나라를 세웠고, 한반도에는 918년에 고려가 세워졌으니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반면 거란의 요나라는 916년에서 1125년까지 유지되었으나 고려는 918년에서 1392년까지 요나라보다 약 200년을 더 유지하였다. 고려는 후삼국시대를 거쳐 태조 왕건이 한반도를 통일하
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중원에서 내란이 발생하거나 분열이 일어나 한족의 세력이 약화되면 그 주위의 국가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곤 했다. 특히 역사적으로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부족들은 한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흉노족이 그랬고,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등이 모두 한족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근세기에 이르기까
당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에서 각 세력이 군웅할거하던 시기인 오대십국을 끝내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했다. 960년 조광윤이 오대 십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후주(後周)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개봉(開封)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송(宋)나라이다. 한때 TV드라마로 유명했던 포청천도 송나라 시기의 인물이다. 포청천은 원래 안휘성 합비 사람으로 청렴한 관료
안녹산의 난과 황소의 난을 겪으면서 당나라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각 지역을 통치하던 절도사들이 각각 독립을 꾀하면서 당나라는 조종(弔鐘)을 울리게 되었다.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훗날 조정에 투항한 주전충은 황제의 실권을 빼앗고 자신이 그 권력을 찬탈하였다. 결국 907년 당나라 황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양(梁)나라를 세워 당나라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당나라의 현종이 양귀비라는 미녀에 빠져 정사를 멀리하고 양귀비의 오빠였던 양국충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당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색을 가까이 했던 황제들의 말로는 비참하게 끝났는데 당 현종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젊을 때의 노력과 총명함은 여색에 흔들렸고 환관과 외척들의 발호로 관리는 부패했고 반면 농민은 압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기쁜 일이나 슬픈일이나 희노애락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술(酒)이다. 우리가 피로 회복제로 마시는 박카스의 어원도 사실은 술을 상징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제우스가 인간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 여인이 제우스에게 본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여 실제의 모습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으로 녹아버렸다. 그러나 그 여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