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싸늘하고 바람이 부는 날엔 따뜻한 라면 국물이 제격이다. 얼큰하고 구수함에 길들여진 우리입맛에 잘 어울려서 일까? 아니면 뱃속 깊숙이 스며드는 온기가 매력적 이어서 그럴까? 둘 다일 것 같기도 하다.나 역시도 과음을 하거나 한 다음날엔 종종 얼큰한 라면국물이 생각나기도 한다. 유년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구수한 소고기 라면의 국물은 무수한 세월이 흘렀
명절에 두 아들이 다녀갔다. ‘품안의 자식’이란 옛말이 아득하다. 외지에 방을 얻어 직장생활 하는 아들의 얼굴을 본지 가물가물하다. 형제가 시간을 맞춰 가족이 모처럼 함께 하니 텅 빈 거실이 밝아지고 연신 그간의 안부를 묻는 장성한 모습에 흐뭇함이 인다.소고기를 굽고, 평소 좋아하는 반찬을 놓으니 금세 식탁이 풍성하다. 큰아들은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하고,
펄 펄 내리는 눈이 마냥 즐겁지만은 못한 듯하다.한해의 시작을 축복하는 축하 세리머니 같은 폭설이라서 그런지 낯설고 야릇한 생각도 하게 된다. 시절의 첫 절기인 입춘을 앞두고 있어서 일까?기나긴 역병의 공포에서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호령하듯 불어 닥치는 눈보라가 두렵다. 봄을 재촉 하는 건지 질책 하는 건지 모호한 시간 속에 계절이 흘려버린 식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인의 농막을 다녀왔다. ‘인적이 드문 곳’이란 속뜻을 알았다.‘사방이 사린(四隣)이다’는 이웃이 많다는 뜻이다. 정작 우리 사회는 갈수록 계산적이고 시비를 거는 분노의 한방에 차있어 진정한 친구 찾는 일이 불능인 시대다. 은근히 적대에 물든 이기적 마음을 버리고 맑은 눈으로 다가와 바라본 산야는 나무와 나무가 너무 다정하고 평
일터에서 내가 하는 일은 리코타를 뜨는 일이다. 야채 토핑 칸에 하얀 리코타 치즈 수천개를 뜨고 일지를 쓰다보면 하루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한 팀에서 일하는 여덟명의 동료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도우며 팀을 위해 생산에 충실한다.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생산의 효율을 위하여 행동은 전투적이다. 쉬는 시간, 추위로 얼었던 몸들이 휴게실로 몰려든다. 마스크 쓴 사
소리 없이 한해의 긴 다리를 슬그머니 건넜다. 참으로 지루하고 두렵기도 한 다리를 건넌 기분이다. 통복천 공원길을 걷다보면 하천 이쪽저쪽을 넘나드는 돌다리가 몇 곳이 있다. 어느 해 여름! 비를 피하려 부지런히 건너다가 실수를 하여 한쪽 다리가 물에 빠져 낭패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조금만 서두르지 않고 차분했더라면 그런 실수는 없었을 것을 하며 돌이켜 보
세탁소 옆 작은 화단, 붉은 열매 풍성하던 산수유나무가 최소한 가지만 짧게 남기고 가지치기를 당했다. 눈여겨보니 파란 지붕을 가리던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매화나무도 단발머리가 되었다. 내 머리카락이 잘린 듯 허전하고 낯선 모습이다. 미적 감각 없는 사람의 솜씨로 보여 눈을 떼지 못 한다. 12월이 되면 가로수 나무들이 짧게 베어나간 기억이 난다. 그 이유를
시간과 세월을 벗어 던진 겨울나무의 자태는 고고하다 못해 고귀하게 보인다. 무성했던 여름의 치장 들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는 용기가 감탄스럽기도 하다. 봄의 정기가 가지 끝까지 차오르도록 인고의 시간과 열정을 생각하면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살을 저미는 통증과 아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을 터이지만 다가올 한파에도 당당 하게 맞서리라 다짐하면서 미련
벽에 걸린 달력은 병정처럼 12월을 지키고 있다. 일에 맞는 옷을 입듯이 나는 주방 앞에서 저녁밥을 지을 때 앞치마를 입는다. 초록무늬 앞치마를 걸치면 자세가 있고, 요리하는 마법사가 된다. 그러다 청국장과 떡만두국을 끓여 알뜰하게 식탁에 놓을 줄도 알았다. 김과 파와 마늘을 냉장고에서 꺼내 수도꼭지에 물을 켠다. 요즘 들어 요리고 무엇이고 귀찮을 때가 많
텅 빈 공중을 허공이라 한다. 모든 것을 비워내고 적막하고 고요해진 허공과 지상에 머물다 떠난 그림자를 본다. 출근길에 늘 바라보던 커다란 느티나무가 빈 몸이 되었다. 검게 야윈 가지에 멧비둘기 한 마리 앉아 있다. 동그란 두 눈동자 흔들리지 않고 무심하다. 견뎌야 할 시간의 무게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사철나무는 사시사철 푸르지만 세상 모든 나무들이 어
매미소리 한창이던 전나무 숲길 사이로 낙엽소리가 아삭 이며 늦은 가을을 배웅하고 있다. 사박사박 걸음을 옮길 때 마다 귀가 간지러운 듯 전나무 기둥들이 두리번거리며 나를 힐책하는 양 바람소리를 빌어 꾸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요란할 때엔 느끼지 못했던 묘한 고요가 장막처럼 펼쳐진 숲을 스크린 속 주인공 같은 걸음걸이로 성큼
금요일 저녁, ‘황혼’ Twilight 을 듣는다. 코타로 오시오의 황혼은 기타 곡 중에서 명곡으로 기타 연습곡으로 자주 들을 수 있다. 내 작은 아들은 기타를 좋아한다. 열 두살이 되면서부터 기타 선율에 끌렸었나보다. 일렉 기타를 사달라고 조르더니, 통기타를 주문한다. 지금은 베이스기타까지 가진 기타리스트이다. 가을학기가 끝나고, 아들은 기차를 타고 대구
고맙게도 타인을 칭찬하는 기술을 가졌다. “오늘 머리가 더 예쁘네”라고 하거나, “옷이 어쩜 그리 잘 어울리니”와 같은 말이 습관화 되어서 상대방을 웃게 만드는 유일한 장점으로 날마다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매일 같이 누군가 한 사람의 장점을 찾아내서 칭찬하라! 조그만 일이라도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칭찬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호감이 가는 부분, 즉 남의 장
하나 둘 지쳐 쓰러져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미물에 조롱당하듯 시름하는 우리를 본다. 낙엽이 사람을 평 하는 것 인지 사람이 낙엽을 숭배 하는 것 인지 몽롱한 착각 속 자연의 현실 속에서 어수선한 가을 앞에 선다. 붉거나 갈색 이거나 누렇거나 얼룩이거나 색깔이 불분명한 낙엽의 정체들을 진맥하려 한다. 여느 때 그 모습이 아닌 창백한 면면이 낯설기도 하고, 긴
계속되는 낮의 노동과 밤의 불면으로 글쓰기는 도무지 실마리 끝을 잡기가 어수선하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매는 하나는 순간 속 기록이다. 손과 뇌가 살아 예민하게 움직이며 사물과 조응한다. 가방 속에 넣은 책을 꺼내 읽는다. 생명의 끈으로 동행하는 고마운 책에는 가뭄 끝에 비를 맞는 기쁨이 있다. 법정 스님의 글은 살아서 세상을 어루만지고 나를 다독
오랫동안 만나지 못 했던 친구를 만나는 날이다. 집으로 초대를 했으니 음식 준비를 한다. 소소한 여행과 차와 술을 가볍게 마시는 일도 시간이 맞으면 부담 없이 만나는 그런 친구들이다. 다 시켜 먹자고 귀찮게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는 친구의 말은 듣지 않는다. 집에 온 손님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정갈한 상차림으로 맞이하는 것이 나의 철학이고 유일한 기
초겨울 문턱인데 아내는 테라스에 앉아 고들빼기나물을 다듬고 있다. 봄나물의 대명사인 씀바귀와 비슷한 나물이지만 지금도 텃밭어귀에 올라온 고들빼기를 정성껏 키우다가 가끔씩 캐내어 새콤 달콤 쌉쌀한 나물로 선 보이거나 장아찌를 담아 식탁에 올린다. 고들빼기는 씀바귀와 달리 잎 끝이 뾰족하고 뿌리가 단단하며 굵다. 따라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다듬는 작업이 매우
기차를 타고 혼자 군산을 다녀왔다.코로나 바이러스로 카페에 앉을 수도 없어 기차에 몸을 의탁하기로 하고 역으로 향했다. 물과 카스테라를 크로스백에 넣고 자유로운 나의 두 손과 두 발을 위해 집 밖을 나가니 가을 햇볕도 환하니 지금이 내 세상이구나!여기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어 군산 기차길과 경찰서 앞을 지나 걸었다. 메밀 비빔면을 먹고 군산 시외버스터미널 상
“저 하늘에 별들이 모두 내 백성 같기만 하구나!” 이 말은 영화 에 나오는 세종의 대사이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나란히 누워 밤하늘에 반짝이며 쏟아지는 무수한 별들을 보았다. 글을 배우던 유년에 엄마의 손이 나의 손등에 얹혀 또박또박 쓰며 벽에 붙이던 글자들이 하늘에 별로 떠서 박혀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주 휴일에는 겨울비가 온
막내 남동생의 집들이가 있었다. 두루두루 모든 일이 잘 풀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누나와 매형이 다 모였다. 나이와 상관없이 삶이 주는 어려움은 누구나 있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생활을 이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은 본인의 몫이다. 피시방을 오랫동안 운영해온 동생은 영업 어려움으로 많은 손실을 보고 어렵게 가게를 처분했다.가게임대월세, 피시 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