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이 모택동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지금도 칭송하고 있지만 사실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복잡하다. 모택동이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인물중의 하나이고 중국에서 국민당의 장개석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그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후 모택동이 죽기 전까지 중국 인민들은 모택동의 잘못된 정책과 그의 권력욕에 많은 희생과 절망을
영국의 역사가이면서 정치인이었던 액턴(Acton)은 “권력은 부패하게 되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라는 명언을 남겼다. 절대 권력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에 따라 미국은 독립하면서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3권분립을 하여 권력간에 서로 ‘견제와
이번 주에는 중국이 코로나 시기에 개최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회의를 합쳐서 부르는 양회가 시작된다. 중국의 최대 정치 행사라고 할 수 있는 2021년도 13기 4차 전국인민대표대회는 5일에 개최되고 그 전날 정치협상회의가 열린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중국에서 형식상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헌법 수정과 국가의 중요한 지도자를 선출한다. 국가
타이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중정기념당이다. 타이완의 수도 타이페이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중정기념당은 장개석이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패배한 이후 타이완에 중화민국을 수립했는데 그가 죽은 후 중정기념당을 만들었다. 광대한 부지와 엄청난 대리석을 사용해서 만든 이곳은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기념당의 주인공인 장개석은 청나라 말기에 태
우리와 인접하고 있는 중국 산동성의 칭다오에 가면 몇 개의 관광코스가 있는데 그 중 빠지지 않고 들리는 곳이 5.4광장이다. 이 광장의 기념물은 붉게 타오르는 횃불의 형상을 하고 있고 앞으로는 해변이고 뒤쪽에는 칭다오 시청이 있다. 칭다오에 또 하나 유명한 것은 한국에서도 자주 마시는 칭다오 맥주이다. 칭다오에 있는 맥주 박물관을 견학해보면 당시 독일의 기
1988년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라는 제목의 영화 한편이 개봉됐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과 음악상 등 그 해 아카데미상을 휩쓸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한 개인의 비극적인 삶이 고스란히 투영되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했던 영화이다. 이 영화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의 삶을 자신이
중국은 주(周)나라 시기부터 천하의 개념을 도입하고 주나라의 왕을 천자(天子)라고 하면서 세계의 중심에 중국을 가져다 놓았다. 이후 춘추전국 시기를 거쳐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의 제국을 만들었다. 중국은 진시황 이래로 중화주의가 완성되었고 주변의 국가들이나 지역은 오랑캐로 여기고 동이, 서융, 북적, 남만으로 세계를 구분
청나라가 붕괴되어 가던 무렵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인 손문(孫文)이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는 손중산(孫中山)으로 불리우며 1866년 중국 광동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했다. 가난을 탈피하고자 어렸을 때 마카오에 건너가 봉제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에 큰 형이 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가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13살이 되던 해에
청일 전쟁 이후 국제사회에서 청나라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고, 국내적으로도 황제의 통치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져 들었다. 청일 전쟁 이후 독일이 산동성 지역을 점령하자 이 지역에서는 청나라는 물론이고 외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원래 산동성과 화북지역은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진과 연태가 개항되면서 서양의 값싼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강력한 적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내우외환에 빠져 있다가 양무운동을 통해 서양의 적들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형식에만 치우치는 모방에 그쳐 진정으로 실력을 키우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청나라를 중화(中華)라고 부르고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여기던 조선도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쇄국 정책을 펼치고
‘양무(洋務)’란 뜻은 ‘서양의 것을 힘써 배우다’라는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정부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중국의 수천년간의 역사에서 그 많은 이민족들이 중원을 공격하고 심지어는 점령하거나 통치한 적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녹아들었다. 중화(中華)라는 말과 같이 문화적인 우월
청나라가 점차 쇠약해지는 가운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서태후이다. 아마 서태후라는 이름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베이징의 유명한 관광지인 이화원을 만든 사람이다. 서태후는 자희태후라고도 불리는데 청나라 9대 황제였던 함풍제의 후궁이었고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였고 황실의 권력을 독차지 하고 전횡을 휘둘렀다. 중국의 역사에서 3대 악녀를 이야기 할 때
홍수전이 배상제회를 세우고 세상을 태평하게 만들겠다고 혁명을 일으켜 남경을 수도로 삼아 태평천국을 건설했다. 태평이란 말을 찾아보면 나라가 안정되고 평안하다는 뜻도 있지만 앞일에 대해 걱정없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뜻이 나란히 존재한다. 혁명의 초기에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해 민심을 획득했고 또한 여성들에 대한 형벌과 같은 전족을 철폐하여 고
1851년 1월 청나라의 군대는 홍수전과 그 일파가 만든 신흥종교 세력이면서 청나라에 반대하는 배상제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많은 왕조가 멸망할 때 대부분 신흥종교가 발생하고 농민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나라가 멸망할 때 명교(明敎)에서 시작하여 명나라가 수립되었고 백련교도나 오두미교 등 많은 반란이 종교의 형식
아편전쟁과 남경조약을 겪으면서 청나라는 서양의 오랑캐들에게 패배를 당했지만 구중궁궐안의 황제와 권력자들은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부족한 세금은 아래로부터 더 거두어 들이면 될 것이고 서양의 오랑캐들은 청나라 황실 스스로가 그랬듯이 시간이 지나면 중국이라는 거대하고 우월한 문명에 동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영
청나라와 영국의 아편전쟁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 중심에 한 인물이 바로 임칙서라고 하는 사람이다. 임칙서는 중국의 복건성 사람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실패하고 고향에서 학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했고 지방에 관리로 부임하여 근무성과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특히 그 지역의 아편을 근절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황제가 그를
청나라 정부는 유럽의 무역에 대한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의 항구중 광저우(廣州)를 개방했다. 중국의 광저우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해외무역의 전진 기지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관문 역할을 했다. 지금도 광저우에는 매년 광교회(광주교역전람회)가 개최되는데 이때에는 세계 각국의 무역상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시내의 호텔을 잡기가 하늘의 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과 같이 만리장성을 넘어 파죽지세로 명나라를 공격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룩했던 청나라도 강희제와 옹정제 그리고 건륭제라는 세명의 황제를 지나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위기는 가장 번성했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하듯이 가장 성했던 시기를 지나자 내부의 모순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만주족은 마치 자
청나라의 옹정(雍正)황제는 1678년에 태어나 1735년에 죽었는데, 아버지인 강희제가 중국 역사에서 가장 긴 황제를 했기 때문에 1722년에 황제가 되어 약 13년간 황제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는 강희제의 4남으로 원래 황태자가 아니었고 어렸을 때에는 놀기를 좋아하고 참을성이 없어 자주 혼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성격을 고치고 매사가 신중해져 강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임금의 명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집권 초기에는 잘하다가 말년에는 여색을 가까이 하거나 판단력이 흐려져 국가의 운명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당나라의 현종은 초기에는 뛰어난 황제로 국가를 발전시켰으나 훗날 양귀비의 미모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하여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였다. 청나라의 경우, 가장 번성했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