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중국 전역을 휩쓸었던 정치운동의 광풍으로 중국 스스로도 십년간의 동란(動亂)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정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며,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권력투쟁이 주 원인이었지만 사건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1959년 말에
모택동의 이상주의적인 실험이었던 대약진이 비극적으로 끝나자 유소기와 등소평이 중국의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했다, 원래 유소기는 모택동 다음의 자리에 있었는데 1959년 4월 국가주석이 되었고 공산당내 정치국의 제 1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 것이 등소평이었다. 모택동은 2선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점차 유소기의 세력이 확대되
유소기는 대약진의 광풍이 중국 대륙을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 그 정책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모택동에게 대립의 각을 세운 인물이다 유소기는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에서 태어났고 지금 호남성의 수도인 장사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후 1920년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 다음해인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성립될 때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1922년에 중국에 귀국
한나라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라는 역사서를 저술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중국 지도자들이 대화중에 사용하는 이야기들도 사기의 내용을 많이 인용한다. 한국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으며 중국의 많은 역사와 인물,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고사성어 중에 “임금에게는 백성이 하늘이고,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다(王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세계와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고 그 관계는 미중소의 전략관계가 변화되는 1972년까지 지속되었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중국은 소련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정권을 유지하면서 중국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스탈린의 입장
모택동은 오랜 혁명 끝에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이제 자신의 이상인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하에 있던 사회 체제에 대해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서 1952년까지 2년동안 삼반운동과 오반운동을 일으켜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저항할 수 있는 세
중국의 서남쪽에 위치한 티베트(Tibet) 고원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평균 고도가 약 4,900미터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며 가장 높은 산은 해발 약 9천미터의 에베레스트 산이다. 이 티베트 고원에는 주로 유목민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기원전 2세기부터 여러 국가들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였다. 이후 송첸캄포(581~649)라는 인물이 663년에 지금의
1921년 7월 소련 다음으로 중국에 공산당이 만들어졌다. 이 당시에 중국은 지식인들이 1차세계 대전 이후 서방 세계에 대해 실망을 하였고 그 대안으로 받아들인 것이 공산당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여 공산당과 모택동 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의 언론매체들은 최근 공산당을 중심으로 중국이 하나가 되어야
중국을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 쥐어 있는 중국 돈에는 딱 한 사람의 인물화만 볼 수 있다. 바로 모택동이다. 그리고 중국의 수도 북경의 천안문 광장 벽에 걸린 초상화의 인물 역시 모택동이다. 중국에서 택시를 타면 어렵지 않게 모택동이 마치 기독교의 십자가 혹은 예수님의 초상처럼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택동 도대체 그는 누구이기에 중국인의 마음속
지난 6월 11일에서 13일까지 영국의 남서부에 있는 휴양지 카비스 베이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G7은 원래 G5로 시작되었는데 1971년 미국이 금태환을 중지한 이후 미국의 재무장관이던 조지 슐츠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장관에게 만나자고 제의하면서 첫 단추가 끼워졌다. 이후 1975년에 프랑스의 랑부이에에서 이탈리아를 참여시
‘일변도(一邊倒)’라고 하는 단어는 한쪽으로 치우치다 혹은 한쪽으로 경도된다는 뜻이다. 1945년 8월에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으나 국제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갈라서면서 전쟁 후 유럽에는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길게 드리워졌다. 베를린에
오래전의 기억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중국의 심양에 있는 자매대학을 방문하였고 그 일정중에 단동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심양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가다 만난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중국쪽에는 단동이 있고 북한쪽에는 신의주가 있다. 단동과 신의주 사이의 압록강에서 두 개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하나는 단교(斷橋)라고 해서 끊어진 다리가 딱 압록강의 중간까지 이어져
모택동이 중국에서 장개석을 몰아낸 후 대륙 곳곳에 남아있던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몰아내고 자신의 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급급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과 국경을 맞닿고 있던 한반도의 상황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인 1949년 6월 주한미군을 철수시켰고, 다음해인 1950년 1월 국무장관이던 애치슨은 2차세계대전 이후 극동지
장개석이 타이완으로 임시정부를 세운 후 국민당은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 후 중화민국은 타이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던 중화민국은 ‘자유 중국’이라고도 했으나 지금의 국제사회에서는 타이완이라는 이름으로 국제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자신들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
장개석이 비록 모택동에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국민당 정부를 이전하였으나 한국과의 유대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45년 11월 장개석은 자신의 부인인 송미령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에서 한국으로 귀환하려는 김구 선생을 초대했다. 이 전별식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한국 독립당 간부와 각계의 요인 2백명을 초대했고 당시 미화 20만달러를 김구에게 전달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에 붉은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의 정계와 학계에서는 한탄이 터져나왔다. “우리는 중국을 잃어 버렸다(We lost China)”란 말로 당시 미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막 시작된 냉전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토와 역사와 인구를 가진 중국을 공산주의 진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전략에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원래 미국
1945년에 접어들면서 세계 곳곳에서 피를 뿌린 잔혹한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해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장개석이 이끌던 중화민국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마지막까지 그 야욕을 버리지 않고 저항하였다. 결국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탄인 원자폭탄을
태평양 전쟁은 크게 보면 2차 세계대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아시아 지역에서의 전쟁을 따로 부르는 명칭이다. 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히틀러가 1939년 9월 1일 폴란드의 서쪽 지역을 침략하면서 그 전쟁의 도화선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1937년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그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은 연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이후 그 야욕을 멈추지 않고 중국으로 확대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을 했고 유럽의 제국주의와 같이 아시아에서도 자신의 제국인 대동아 공영권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선을 따라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 1931년 9월 18일을 기점으로 만주사변을
1992년 8월 23일에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여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해지자 많은 한국의 기업인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이 초기에는 심양(瀋陽)으로 많이 진출했다. 심양이 가지는 지리적 특징은 중국의 동북3성인 랴오닝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진출하는 통로의 역할을 했고 동시에 동포들이 많이 살아 언어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