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이 작용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실행은 선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여기서 표를 많이 얻은 정당이 국민의 의사에 따라 정해진 기간 동안 국회 혹은 정부를 책임진다. 그리고 또 4년 혹은 5년 후 국민의 재신임을 투표를 통해 묻는 과정을 되풀이하여 권력의 독점이나 오남용을 방지하는 시스템이 작동된
민족주의(nationalism)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국내적으로 혹은 국외적으로 그것이 표현된다. 국내적으로는 민족의 단합과 단결을 통해 국가의 힘을 강하게 하는데 사용되며, 대외적으로는 독립 혹은 자신의 영향력을 외부로 팽창시키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고통받을 때 민족의 지도자들이 주장한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에릭 아서 블레어는 인도에서 출생한 영국인 작가였다. 그는 ‘동물농장’과 ‘1984’라는 유명한 소설을 남겼다. 그 중에서 ‘1984’는 미래의 사회가 전체주의에 빠진 것을 상징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의 상상속에서 그려진 전체주의 국가인 오세아니아에는 최고의 지도자인 ‘빅 브라더( Big Brother)’가 전체 사회를 통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이 수출입국을 국가의 정책으로 설정하고 대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위해 전세계를 향해 뛰고 있었다. 그 중 중국의 남쪽에 있으면서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길목에 홍콩이 위치하고 있었다. 홍콩은 영어로는 Hong Kong이라고 쓰고 중국어로는 ‘샹강(香港)’으로 발음하고 한자로는 향기로운 항구라는 뜻이다. 중국의 명나라 시기에 이 지역에
세계가 코로나와 금융 인플레로 한창인 지금 중국에서 19차 전당대회 제6차 중앙위원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그 회의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발표되었는데 ’역사결의‘이다. ‘역사결의’라고 하는 것은 중국내에서 커다란 변화, 즉 중국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역사결의’가 오직 두 번만 있었다. 첫 번째는 1941년부터 준
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경제질서는 미국이 주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해체되기 이전의 소련이 냉전(cold war)체제에서 미국과의 총체적 경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말의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 시작했고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로 재편성되면서 냉전은 종식되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물리친 미국은 다시 세계의
역사적으로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간에는 항상 긴장감이 맴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케네디 스쿨 학장을 역임한 그레이엄 앨리슨은 한권의 책을 출간했다.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이란 이름의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 셀러에 올랐고 한국에도 번역서가 나왔다. 앨리슨은 미국에서 손꼽는 국가 안보와 군사정책의 전문가이며 미국 국방장관
모든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내 및 대외 정책을 실시하며 이것은 국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등소평은 중국의 국가적 이익을 경제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대외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교류에 있어서 “중국은 절대로 대립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겠다”고 천명하면서 국제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스스로 중국의 외교
후진타오는 등소평에 의해 이미 낙점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권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특별한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중국에서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부모의 후광이 상당히 중요했으나 그는 이 부분에서는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후에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을 대거 등용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다. 후진타오 이전의 등소평과 강택민은 성
후진타오는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의 뒤를 잇는 제4세대 지도자이다. 그의 조상은 원래 황산이 있는 안휘성 출신으로 장사에 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조상은 강소성까지 진출하여 차를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였고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아버지는 당시 엘리트로 학교 교사를 지냈고 어머니 역시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교사였다. 이
강택민은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 그리고 권력의 가장 핵심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으면서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등소평과 공산당 원로들에게서 부여 받은 것으로 초기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권력을 잡고 처음 개최된 1992년 10월에 개최된 14차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는 등소평이 남순강화에서 발표
강택민은 양주 출신이고 그의 기본적인 정치활동의 무대는 상하이였다. 중앙에서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과 경제특구를 설립하는데 참여하면서 등소평과 공산당 원로들의 눈에 들었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1980년에서 1983년까지 상하이는 아직 개방정책의 세례를 받지 못했고 발전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시 시장은 왕도함(汪道涵)으로 임기가 다되었
중국의 개혁파의 리더는 등소평이었지만 그 밑에 있던 호요방은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민의 자유에 대해 더 많은 개방을 주장했었다. 그는 비록 중국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한편 원로들의 미움을 받았다. 그의 죽음이 촉발한 것이 바로 1989년의 6.4 천안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현재의 중국 정부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등소평이
천안문 사건은 등소평과 당시의 중국 정국을 주도하던 개혁파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비록 무력으로 진압을 하고 사회적 안정은 유지하였으나 정권 내부에서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천윈(陳雲) 등의 보수파는 천안문 사건의 배경이 궁극적으로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국민들에게 지나치게 자본주의를 개방했기 생긴 사건이라고 공격하였다. 특히 천윈의 ‘새둥지 경제론(鳥
1978년말 등소평에 의해 시작된 개혁개방과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은 세계의 주목을 끌면서 성공적으로 보였다. 서구에서는 값싼 노동력과 저렴한 제품을 만드는 중국으로 인해 물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중국도 외화를 벌어들이면서 경제적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의 뒷면에는 빈부격차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씩 커져 가고
등소평이 중국에서 권력을 잡은 후 시행한 개혁정책과 개방정책이 중국과 중국인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었고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정책은 크게 ‘흑묘백묘론’과 ‘선부론(先富論)’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흑묘백묘론은 원래 자신의 고향이던 사천성 속담에 ‘흑묘황묘론’이 있는데 이를 차용해서 사용했다. 그 의미는 “검은 고양이던 하얀 고양이던
등소평이 권력을 잡은 중국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1949년에서 약 30년동안 철저한 계획과 분배의 어두운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등소평의 정책은 매우 간단했다. 가난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론을 완성하였다. 등소평은 국가의 목표를
21세기의 중국은 이전의 중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NO라고 할 수 있는 중국’, ‘할말은 하겠다는 중국’ 여러 가지 수식어가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단어를 대신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은 일본과 독일을 제치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Great of Two)국가로 성장하였다. 1992년 한중수교시의 한국을 환대하고 한국인을 좋아하던 중국
모택동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이 기회를 노린 4인방과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임표가 앞장서 있었다. 특히 임표는 국방장관에서 부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임표는 1925년에 공산당에 가입했고 장개석의 국민당이 만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국민당군에서 빠져나와 모택동의 군대에 합류했고 전투에 능해 뛰어난 사령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중국 전역을 휩쓸었던 정치운동의 광풍으로 중국 스스로도 십년간의 동란(動亂)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정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며,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권력투쟁이 주 원인이었지만 사건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1959년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