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라의 환공이 춘추시기에 맹주로 등장했을 때 그의 권력이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사후 시신도 수습을 못할만큼 비참한 상태에 빠졌고 자식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골육상쟁을 벌이다 나라가 쇠락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역사는 권력의 성쇠를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경고를 하고 있으나 권력의 독배에 취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오류를 반복하고 있
춘추 시기 초기 전국을 호령했던 맹주인 제나라의 환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소신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환공도 그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환공 재위 38년에 주나라의 왕이었던 양왕의 동생이 이민족과 결탁하여 주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환공은 관중을 보내 주나라를 도와 이민족을 몰아냈
제나라의 환공은 초기에 국력을 강화하고 관중의 말을 따라 선정을 베풀었기에 제나라 사람 뿐만 아니라 주위의 제후국들이 그를 따랐고 자연스럽게 그의 위치가 올라갈 수 있었다. 환공이 제후가 된지 7년이 되었을 때 제후들은 환공을 맹주로 받들어 그가 춘추시대의 초기를 이끌게 되었다. 이후 그는 북방의 이민족이 연나라를 공격해오자 군대를 파견하여 연나라를 보호해
주나라는 여왕과 유왕이 정사를 게을리하고 자신의 탐욕과 여색을 밝히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유왕 다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원래의 태자였던 평왕이었다.그는 서쪽의 견융 등 이민족들의 공격에 불안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도읍을 동쪽의 낙읍이란 곳으로 천도했다. 이때가 기원전 770년이었고 이때부터 기원전 476년 전국(戰國)시기가 시작될 때까지 약 2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루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했다.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고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하물며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국가들이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나라가 망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는 사례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상나라의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무왕은 자신들의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였다. 가장 큰 공을 세운 강태공에게는 지금의 산동성 동쪽 지역을 주었고 나라 이름을 제(薺)라고 하였는데 바로 산동성의 수도인 제남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또 자신의 동생인 주공에게는 곡부를 주었고 나라 이름을 노(魯)라고 하였다. 이후 공자의 고향이 바로 곡부였고 지금도 공자와 관련된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에게는 뛰어난 지략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윤으로 손자병법에서도 등장한다. 손무의 손자병법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지지 않는다”라는 병법이 있다. 여기서 손자는 상나라가 흥기한 것은 이윤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이윤은 탕왕을 만난 이후 그를 도와 적국의 동태를 파악하여 적
요순을 이어 받은 우왕은 세금을 면제하고 치수를 통해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른바 복잡한 규제를 제거하고 행정을 간단히 하여 업무의 편의와 효율성을 높여 주위의 부족들이 스스로 찾아와 신하와 백성이 되기를 청했다고 한다. 사기에 따르면 우왕은 약 45년간 왕위에 있었고 근검 절약으로 타인의 모범이 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문제가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왕조를 묘사해놓은 본기 중에서 오제 본기는 신화의 시기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내용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천 역시 이 부분도 역사적 고증없이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임을 은근히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하(夏)왕조부터는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로 믿고 자신의 사기를 쓴 것 같다. 그 내용이 하본기(夏
삼황오제의 시기 중에서 오제의 시기는 중국인이 황하를 중심으로 정착 생활과 농경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삼황오제, 특히 오제의 경우는 중국의 최초의 왕조로 알려진 하(夏)나라의 전단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나라도 아직 그 실체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중국의 여러 역사문헌에 등장하고 있고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본기에서 오제(五帝
사마천의 역사서인 사기는 중국의 신화 시대부터 다루고 있다. 우리가 역사와 선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기록에 근거한다.즉 기록이 남아 있는 시기는 역사시기 그리고 기록이 없을 경우에는 신화 혹은 설화라고 하며 선사시기라고 이야기한다. 중국 역사에서 기록이 남아 있고 그 유적이 발굴된 것은 은나라 시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나 말의 뼈, 혹은 거북의 등뼈에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서양을 대표하는 역사책들이 있다. 서양에는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40년경에 ‘역사’라는 책을 썼는데 모두 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시아와 유럽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 전쟁까지를 담고 있다. 그는 여행을 좋아하여 자신이 지중해와 흑해 지역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하였는데 서양에서는
올해로 한국과 중국이 국교수립을 한 지 30주년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한중관계 10년, 한중관계 20주년에는 새해부터 다양한 양국간의 행사가 개최되고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곤 했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의 영향도 있지만 한중관계 30주년의 행사가 축소되었고 마치 빛바랜 사진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015년 당시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승전
21세기에 들어와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를 말하라면 단연코 상하이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상하이는 중국의 4개 직할시 중의 하나이며 중국의 경제, 금융, 무역, 해운의 중심으로 중국 최고의 도시이다. 또한 가장 인구가 많으며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도시가 상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경을 정치 수도, 상하이를 경제 수도라고도 부른다. 이 상하이에 거주
한국과 중국이 1992년 8월에 국교정상화에 서명한 이후 양국의 정치와 경제적 관계는 세계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발전하였다. 한국의 개인과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국에 뛰어들었고 이들에게 중국은 커다란 기회의 시장으로 보였다. 한국은 당시 민주화와 임금인상이라는 산업구조 재편의 국내적 요구와 세계 시장에서 보다 질좋고 가격 경쟁력이 있는 제품의 생산이
한국과 중국은 한국전쟁 이후 서로를 중공과 남조선으로 부르면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은 항상 북한 편을 들었고 한국을 미국의 전진기지 정도로만 취급하였다. 그러나 한국이 70년대와 80년대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였고 아시아의 4마리 용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한국 역시 북한의 상시적인 위협에 직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서 13차 5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개최되었다. 중국의 전인대는 일반 국가의 입법기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앙과 지방 그리고 각 직능별 대표들이 참석한다. 매년 3월 초에 각 대표들이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대회당에 모여 중국의 행정부인 국무원의 정부공작 보고를 청취하고 중국 공산당이 이미 결정한 내용들을 추인한다.
현재 러시아가 불법적인 침략을 도발하여 함락의 위기에 빠진 키예프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지도자와 함께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으나 워낙 군사력의 차이가 압도적이어서 그 함락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동유럽에 위치하고 있고 러시아의 동쪽과 남쪽에 국경을 가지고 있으며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몰도바와 루마니
국제사회에서 정의(正義)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힘(國力)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을 자주한다. 지금 유럽에서 러시아가 자신보다 훨씬 힘이 약한 우크라이나를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고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다. 유럽의 열강들은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많은 국가들을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고 지배했으며 식민지에서 경제적, 정
북경 올림픽에서 한국의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에 뭔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끼는 국민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 한국과 중국의 소셜네트워크에서는 서로의 비방전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고 한국의 유력 대선 후보들도 이에 편승하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한국에 있는 중국 대사관이 한국의 언론과 정치인에 대해 평가를 하는 등 외교적 결례를 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