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국 7웅이 할거하던 시기가 점차 균형이 무너지면서 진(秦)나라의 힘이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진나라와 국경을 맞닿고 있던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는 내분에 휩싸여 국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북쪽의 연나라와 동쪽의 제나라 그리고 남쪽의 초나라도 진나라의 강력한 군사정책과 이간책에 빠져 점차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때 서로 각자도생을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전국시기 중엽 소진과 장의의 합종연횡책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후 안정이 깨어지고 다시 혼돈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진나라는 여전히 강대국의 자리를 지키고 다른 6개국을 넘보고 있었다. 그중 조나라는 새로운 왕을 맞이하여 일대 쇄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나라의 무령왕은 6번째 군주였고 기원전 325년에서 299년까지 살았으며 왕으로 재직한 것이 약 27년간이
초나라 왕은 장의가 땅을 준다는 말에 제나라와의 합종책을 깨고 진나라와 연횡하였으나 후에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이때 진진이라는 신하는 다시 나서서 진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진나라와 힘을 합쳐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도 진진의 건의는 무시되었고 굴개라는 장군을 임명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도록
소진은 합종책으로 6개의 나라를 연합하여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합종책을 깨뜨린 것이 장의의 연횡책이다. 원래 소진과 장의는 당시 유명했던 귀곡선생 밑에서 동문수학을 하던 관계였다. 같이 공부할 때부터 소진은 장의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자신이 그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의는 학업을 마친 후에 초나라의 한 관료 집에서
연(燕)나라 왕을 설득하여 합종책을 승낙받은 소진은 이제 진나라를 포위하려는 전략을 준비하였다. 전국시대에 있었던 합종과 연횡은 동서양의 역사에서 유사한 사례들을 많이 살펴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때 강력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연합하였고 이후 미국을 끌어들여 전쟁에 승리를 거두었다. 2차 세계대전 역시 독일과
최근 수년간 세계는 전대미문의 코로나로 고통받았고, 이제 그 긴 고통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미래를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국제정치와 경제질서에 타격을 주고 있다. 여기에 미국이 ‘미국 우선주의’에 빠져 끊임없이 빅스텝과 자이언트 스텝으로 금리를 올리자 한국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는 두 가지를 향해서 움직인다. 첫째는 생존의 문제이고 그 다음은 경제적 번영이다. 생존과 번영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서로 맞물려있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기 수많은 제후 국가들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이를 제공하는 많은 책사와 모략가들, 사상가들이 생겨나고 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진(秦)은 중원의 서쪽에
상앙이 드디어 효공의 마음에 드는 부국강병의 방안을 내놓으면서 진나라에 등용되었다. 효공은 상앙의 정책이 마음에 들었으나 반대하는 여론을 생각해 그 정책을 바로 실시하지는 않았다.상앙은 한번 더 효공에게 자신의 방책을 건의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은 일이 끝나도 알지 못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일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그 성공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
황하를 중심으로 중원 지역의 많은 제후국들이 서로 갈등과 전쟁을 일으켜 세력이 약해지고 있는 동안 서쪽 지역에서 조용히 한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훗날 춘추전국시기를 마무리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가 서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진나라는 원래 서쪽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의 제후들은 진나라를 서쪽 오랑캐로 여기고 무시했으며 회맹의
오자서가 죽으면서 자신의 눈을 뽑아 동문에 걸어놓으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모두 잃고 오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음에도 간신의 이간질을 이기지 못한 부차는 그를 무시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오자서가 죽은 후 월나라의 뇌물을 받았던 재상 백비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자신의 군주에게 올바른 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와신상담의 이야기는 오나라와 월나라간의 전쟁에서 만들어진다. 와신상담은 절치부심과 비슷한 내용으로 해석되는데 모두 원한을 풀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합려는 월나라의 정복에 실패한 후 상처가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렀고 이때 아들 부차(夫差)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자신의 원수를 갚아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부차는
춘추전국 시기에 많은 나라들이 살아남기 위해 인재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모아 세력을 형성하였다. 최근에 식객이라고 하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세력이 있는 집안에 손님으로 머물면서 그 주인을 도와주는 인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식객을 많이 거느린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과 재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가장 많은 식객
우리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지만 공동의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고사성어 중에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오월은 오나라와 월나라를 지칭하며 중국의 양자강 하류 지역에 자리를 잡았던 제후국을 말한다. 이 지역은 양자강 남쪽 지역으로 지금의 강소성과 절강성에 위치하고 춘추전국 시기에는 중원에서 상당히 멀리 떨
초나라의 장왕이 맹주가 되어 중원에서 세력을 떨친 후 그가 사망하자 초나라의 국력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초장왕의 아들인 공왕도 오래 살지 못했고 그 아들인 강왕 역시 단명했다.강왕은 자신의 아들인 겹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숙부인 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위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영왕이다. 이 사건은 조선 시대에 세조가 권력을 찬탈하려
주나라가 비록 세력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천자(天子)라는 명맥이 살아 있어 왕(王)이라는 호칭과 유명무실한 주군의 역할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주위의 제후국들은 제후 혹은 공(公)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한편 중원의 남쪽에 새롭게 초나라가 등장했다. 초나라의 위치는 중국의 장강 남쪽에 있어 주류 문화가 아닌 독자적인 남쪽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중원에서
오늘날 국제정치를 이끌어 가는 주요한 세력은 현실주의이다. 현실주의는 국가가 중심이 되고 국가의 경제력, 군사력 등을 중심으로 국가간의 위계가 정해진다. 그래서 사실 국제정치는 무정부적이고 힘(power)이 곧 정의(justice)가 되는 상황을 자주 볼 수 있다. 21세기에도 200개가 넘는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고 국제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유엔에서 활동하
제나라의 환공이 춘추시기에 맹주로 등장했을 때 그의 권력이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사후 시신도 수습을 못할만큼 비참한 상태에 빠졌고 자식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골육상쟁을 벌이다 나라가 쇠락의 길을 피하지 못했다. 역사는 권력의 성쇠를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경고를 하고 있으나 권력의 독배에 취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오류를 반복하고 있
춘추 시기 초기 전국을 호령했던 맹주인 제나라의 환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소신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환공도 그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환공 재위 38년에 주나라의 왕이었던 양왕의 동생이 이민족과 결탁하여 주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환공은 관중을 보내 주나라를 도와 이민족을 몰아냈
제나라의 환공은 초기에 국력을 강화하고 관중의 말을 따라 선정을 베풀었기에 제나라 사람 뿐만 아니라 주위의 제후국들이 그를 따랐고 자연스럽게 그의 위치가 올라갈 수 있었다. 환공이 제후가 된지 7년이 되었을 때 제후들은 환공을 맹주로 받들어 그가 춘추시대의 초기를 이끌게 되었다. 이후 그는 북방의 이민족이 연나라를 공격해오자 군대를 파견하여 연나라를 보호해
주나라는 여왕과 유왕이 정사를 게을리하고 자신의 탐욕과 여색을 밝히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유왕 다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원래의 태자였던 평왕이었다.그는 서쪽의 견융 등 이민족들의 공격에 불안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도읍을 동쪽의 낙읍이란 곳으로 천도했다. 이때가 기원전 770년이었고 이때부터 기원전 476년 전국(戰國)시기가 시작될 때까지 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