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정책▲가족돌봄서비스바우처(월 70만 원) 기존 6개월에서 12개월로 기간 2배 증가 ▲신체·정신건강 개선 자기돌봄비, 분기당 50만 원(연 최대 200만 원 지원)으로 상향 ▲고립은둔 청년 방문상담, 공동생활 경험·가족관계회복 등의 지원이 청년 320명·가족 640명으로 확대 ▲자립수당(18세 이후 보호종료 청년) 기존 월 40만 원→50만 원으로 10만 원 상향 ▲빈일자리 취업 장려금(조선, 물류 등) 최대 200만 원(6개월간) 지원 ▲대중교통 요금 할인 ‘K-PASS’, 청년 30%(일반 20%, 저소득층 53%) 할인
지난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유산이자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이하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다. 부여왕릉원의 서쪽 골짜기인 능산리 절터 인근에서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것인데, 발견 이후부터 연일 전국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등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 발견 3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9월 23일부터 오는 2월 12일까지 박물관 내 기획전시관에서 실제 금동대향로를 무료로 전시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2024년 갑진년(甲辰
19세기에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아편 무역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했다. 아편의 확산은 사회 질서와 도덕성의 문제로 여겨졌고, 정부의 통제력 약화를 초래했다. 이에 따라 아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청나라는 아편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는 크게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으로 대별된다. 느슨한 통제를 의미하는 이금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황실의 의전을 주관하는 관청인 태상시(太常寺)의 소경(少卿, 정4품에 해당) 쉬나이지(許乃濟)이다. 쉬나이지는 부패
청 정부의 아편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지방무역상인으로부터 중국으로 밀수되는 아편의 유입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사회와 경제적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광둥체제 시기에 외국 상인이 청나라와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銀)으로 거래해야 했다. 아편이 유입되기 전에는 중국이 무역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유입되는 은의 양이 대폭 증가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회에 경제호황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편의 밀수가 증가하면서 무역의 역조현상이 일어났고, 중국에 유입된 은은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은의 유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중국과 무역을 시작한 1713년 이후부터 무역흑자를 가져간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무역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아편을 밀수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당시에도 아편무역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청 정부는 1729년(옹정 7년)에 개인이 아편을 마시거나 피우는 것을 금지하였고, 이러한 흡음 장소의 개설도 금지시켰다. 1796년(가경 1년)에는 외국 아편의 유입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심지어 아편 자체를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밀수조직과 부패한 청나라 관리의 결탁으로 아편 유입량은 점점 더 증가하였다. 영국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1713년 중국과 무역을 시작한 이후부터 무역흑자를 가져간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산업자본가와 자유무역상인은 동인도회사가 중국 시장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불공정함을 호소했고, 자유로운 무역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독점권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대중 무역적자 해결과 통상항구 확대를 위해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영국은 세 번에 걸쳐 청나라에 사절단을파견하였다. 첫 번째는 1793년(건륭 58년) 조지 매카트니(G. Macartney)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이 청나라와
‘일구통상’ 즉 ‘광둥체제(Canton System)’는 주로 중국이 1757년부터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85년 동안 외국 상인들이 광저우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시행한 정책을 의미한다.역사적으로 광저우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일구통상 정책이 실시되었다. 첫 번째는 명나라 시기인 1523년부터 1566년까지 43년 동안, 두 번째는 청나라 초기인 1655년부터 1684년까지 29년 동안, 세 번째는 1757년부터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85년 동안 이루어졌다.광둥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던 영국은 무역
한때 동아시아는 유럽 사람들에게 이상향의 세계였다. 동방의 어딘가에 황금의 나라인 엘도라도(Eldorado)라는 낙원이 있을 것이라고 동경하기도 했고, 또 그곳에는 후추와 계피 같은 향신료의 군락지가 있어 자유롭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동경과 믿음이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구 사람들을 대항해의 모험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게 하는 ‘지리상의 발견(Geographical Discovery)’으로 이어졌다. 대항해의 성공으로 지중해 중심의 무역이 대서양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중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권위는 중국 전역은 물론 주변 국가와의 관계도 포함하였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중국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방면에서 어떠한 교류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국가는 오로지 중국의 방식에 따라야만 했다. 무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국가만이 중국과의 무역이 허용되었는데 이를 ‘조공무역(朝貢貿易)’이라고 한다. 조공무역은 조공과 무역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조공은 조공국인 조선, 류큐(琉球), 베트남 등의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면 황제는 그 댓가
1616년 여진족(女眞族)의 후손인 누르하치(1559~1626)가 만주(지금의 동북지역)에서 후금(後金)을 세웠고 1618년부터 명나라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626년 누르하치 사망으로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1592~1643)가 왕좌에 올랐고, 1636년에는 황제로 칭하면서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개명하였으며 선양(沈陽)을 수도로 삼았다.1643년 3대 황제인 순치제가 즉위하고 그 이듬해인 1644년에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으로 진군하여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베이징 진입 이후에도
명나라(1368~1644) 4대 황제인 영락제(재위 1403~1424)가 정화에게 7번의 원정(1405~1433)을 명한 데에는 경제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1271~1368)를 멸망시킨 주원장(朱元璋, 재위 1368~1398)은 원나라와는 달리 국가 간 무역 중심이 아닌 농업 중심의 폐쇄적인 국가 운영을 지향하였다.농업 중심의 국가 운영은 원나라 때 구축했던 대륙 간 육로 무역을 쇠퇴시켜서 이 육로를 통해 유입되었던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물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지폐가 아닌
중국이 서양으로 인한 침략을 받게된 가장 큰 이유는 명청 시기에 해양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 유럽 국가들이 이미 15세기부터 국제 정치나 지역 간 관계에서 자신의 영토나 영향력을 확장하고 강대한 국가로 성장하려고 시도한 점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포르투갈은 15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항로의 발견을 통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탐험하고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에 콜럼부스가 발견한 신대륙, 즉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바로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중국 역사를 고대, 근대, 현대, 당대로 구분한다. 특이한 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고대와 근대 사이의 중세 시기가 없다는 점이다.1840년 이전까지의 역사는 모두 고대에 속하고, 근대는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19년 5·4운동까지이며, 현대는 1919년 5·4운동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이다.신중국이라고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를 현대와 구별하여 당대(當代)로 구분한다.중국 근대사의 시작을 17세기 명청 교체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중국인 학자나 서양인 학자 사이에서 대체로 일치
중국 최고의 역사서로 손꼽을 수 있는 사기(史記)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고 있다. 보통 책을 집필할 때 서론은 항상 처음에 있게 마련인데 사기는 서론과 저자 소개가 책의 제일 뒤에 있다. 아마 그 이유는 사마천이 사기를 쓰면서 다른 인물들에 비해 자신을 먼저 드러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그는 책의 서문을 제일 끝부분에 ‘태사공 자서’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고 사기를 마무리하였다.그 자서에는 자신의 집안에 대해 설명했는데 대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하였으며 자신의 아버지였던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 적도에 위치한 섬나라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는 18,0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 도서국((島嶼國), 국토가 몇 개의 커다란 주요 섬과 여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으로, 가장 유명한 섬으로는 '발리섬'이 손꼽힌다.필자는 지난 9월 초, 신들의 섬이라 불리는 발리로 떠나 다양한 현지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인도네시아 발리섬 현지 문화와 문화재 등에 대한 기획취재에 나섰다.이에 필자는 '발리섬의 유래'와 가장 기억에 남는 '울루와뚜 사원'에 대한 이야기를 평안신문 독자들께 소개한다.
중국 절강성의 수도인 항저우에서 아시안게임이 개최되었다. 이번에 개최된 제19차 아시안 게임은 원래 2022년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한 해가 연기되어 올해에 열렸다. 그 기간은 9월 23일에서 10월 8일까지 약 2주간 이어질 것이고, 모두 45개의 회원국 12,000명의 선수가 참여하는 아시아 최대의 축제가 되고 있다. 한국은 역대 최대 규모인 1,140명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메달 50개 이상을 따서 종합 3위를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중국은 1990년 베이징, 2010년 광저우에 이어 세 번째 하계 아시안
며칠 후면 우리나라의 최대 명절의 하나인 추석이 다가온다. 재래시장과 백화점에는 추석 준비에 여념이 없다. 친척과 친구, 또 인사할 곳을 생각하면서 어떤 선물을 보내야 할지 자신의 주머니 사정이 어떤지 복잡하게 지나가는 한 주가 되고 있다.이미 지난주부터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하거나 혹은 봉안하고 모신 곳을 찾아서 인사를 드리는 인파들로 인해 고속도로는 대만원이었다. 물론 진정한 추석의 귀경행렬은 추석이 시작되면 본격화 될 것이다. 서울서 부산까지, 서울서 목포까지 거의 10시간의 정체에도 고향을 찾는 귀소본능을 멈출 수는 없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경제적으로 부를 이룬 뛰어난 사업가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등장하는 인물들이 정치적인 식견도 탁월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범려나 강태공을 그 예로 들 수 있고 또 한명의 인물로 자공을 빼놓을 수 없다.우리의 일상생활이나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유교이다. 젊은이들이 차를 탈 때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장유유서’이고 또 설날과 추석날 차례를 지내는 것, 제사를 모시는 것, 이 모두가 유교에서 나왔다.또한 부모가 자식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하는 것 역시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때때로 배우고 익
오나라와 월나라간에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월나라의 왕 구천은 와신상담을 하면서 복수의 나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국가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지혜로운 인재를 등용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계연과 범려라고 하는 인물이었다.계연은 범려의 스승이기도 했고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는 구천에게 전쟁이 있을 것을 항상 미리 준비해야 하고 또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 물건을 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계연은 목성이 서쪽에 있으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들고 북쪽에 있으면 수해가 발생하며, 동쪽에
강태공은 중국에서는 태사공으로 표기하는데 동일 인물이다. 강태공은 부의 원칙과 원리를 자연적인 섭리와 인간의 심리에서 찾고 있다. 그는 그 당시를 기준으로 아주 오랜전 전설의 시기에 대해서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선언했다.대신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의 심리는 귀와 눈은 아름다운 것을 들으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려고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입은 소고기와 양고기 등 좋은 맛을 보려하고 몸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마음은 권세를 누리고 자신이 유능하다는 것을 뽐내고 자랑하고 싶어한다.강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