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저 혹은 범수라고도 불리우는 뛰어난 유세가가 있었다. 그는 원래 위(魏)나라 사람으로 병법과 전략이 뛰어났고 다른 인재들과 함께 자신이 의탁할 제후를 찾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교수나 지식인들 중에서 현실정치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범저는 자신의 능력을 알리고 싶어도 그럴만한 돈이 없었고 그래서 위나라의 관리인 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만남과 이별을 하게 된다. 그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또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과 인재를 주위에 둘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 사귐의 가장 좋은 예로 사마천은 위나라의 공자였던 신릉군을 거론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기 말엽에 진나라의 세력이 나날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儒敎)의 창시자는 공자(孔子)이고, 그의 행적과 언행을 기록한 글이 논어(論語)이다. 지금도 논어를 통해 사람이 살면서 갖춰야할 예의와 통치자의 올바른 정치를 논하곤 한다. 공자에서 시작된 유교가 오늘날까지 알려지게 되고 또 중국의 역사에서 한(漢)나라 이후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맹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맹자가
중국 요리를 좀 먹을 줄 안다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장조림과 비슷한 동파육(東坡肉)을 한번쯤은 맛보았을 것이다. 중국의 유명한 4대 요리라고 하면 북경요리, 절강요리, 사천요리, 광동요리를 말할 수 있는데 동파육은 상하이와 인접한 절강성 음식이다. 만드는 방법은 우리의 삼겹살 부위를 크게 잘라서 거기에 간장과 설탕 및 중국의 소스를 넣고 끓여서 나오는데 비계가 있음에도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특히 중국 술인 고량주와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식의 이름이 동파육이 된 것은 소동파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
춘추시대에 많은 국가들이 약육강식의 과정을 겪고 최후에는 7개의 국가만이 살아남았다. 이를 일컬어서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하였고 각 국가간에는 피말리는 전쟁과 경쟁의 연속이었다. 이 시기에 두 명의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소진과 장의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귀곡자의 제자로 합종과 연횡에 대해 공부하였고 소진이 먼저 나와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합종
춘추전국의 어려운 시기에 당시의 현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뜻과 포부를 널리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하나는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멀리 산속에 은거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귀곡자(鬼谷子)라는 현인이 있었는데 귀신이 살 정도로 험한 계곡 속에서 산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통치에 접목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세상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와 맹자는 인의예지를 통해 왕도정치를 실현하면 평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노자는 무위자연으로 세상의 이치를 자신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가능해진다고 믿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명멸했는데 이를 제자백가
중국의 사람관계는 오랫동안 법(法)보다는 인정(人情)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처럼 여겨졌다. 물론 여기에 어떤 부탁이나 청탁을 위해서 가져가기도 하지만 선의의 선물인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도 이전에는 친인척을 방문하거나 친구의 집에 갈 때 작은 선물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베이징은 매년 3월이 되면 경비도 삼엄해지고 긴장감이 맴돈다. 지하철을 이용하던 시민들은 소지품 검사가 강화되어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묵묵히 지시에 따라 자신의 가방이나 소지품을 검사대에 올려 놓는다.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대회당 주변으로 사복과 정복을 입은 공안(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주변을 살피고 있다. 그 이유는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오나라의 왕 합려의 신임을 받으면서 그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합려 역시 자신이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나라를 이겨야 했기 때문에 군신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초나라의 소왕이 낭와라는 아들에게 병사를 주고 오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손무와 오자서가 있는 오나라와의
중국의 장강(長江)은 약 6천 킬로미터가 넘는 중국에서 가장 긴 강이다. 그 하류는 중국의 절강성과 상하이 앞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데 장강의 하류는 비옥하여 예로부터 농업과 어업이 잘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중국어로 ‘어미지향(魚米之鄕)’, 즉 생선과 쌀의 지역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춘추전국 시기에 이곳에 두 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오나라
춘추시기 말기에 제나라 출신의 뛰어난 병법을 구사하는 인물이 등장했는데 바로 ‘손자병법’을 저술한 손무이다. 손무가 저술한 손자병법은 고대 중국뿐만 아니라 지금의 중국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는 기원전 515년에서 512년까지 모두 13편의 병법서를 작성하였고 이를 오나라의 왕 합려를 만났을 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오
주나라 시기에 진(陳)나라에 완이라는 공자가 있었는데 전란을 피해 제나라에 와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때 제나라의 환공이 그를 좋게 보고 직책을 내렸는데 이후 그는 성을 전(田)씨로 개명하였다. 그의 후손 중에 첩의 자식으로 사마양저가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은 전양저인데 그가 사마라는 관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불러 사마양저라고 하였다.
춘추전국 시대에 많은 사상가와 철학가들이 등장하였고 또 사라져갔다. 그 중 대표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이다. 한비자는 한(韓)나라의 공자 중에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한비자가 남긴 글은 약 10만자가 넘고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55편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사상은 크게 노자의 ‘도’와 순자의 ‘예의질서’
한자의 고사성어를 아는 사람들은 붕정만리(鵬程萬里)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이 단어를 흔하게 접할 수 있는데 그 직접적 해석은 “붕이라는 새가 한번에 만리를 날아간다”는 뜻이다. 이 말은 상대방이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웅비하라는 축복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붕정만리’의 유래는 장자가 쓴 소요유(逍遙遊)편에 실려있다.
노자(老子)의 사상은 훗날 장자(莊子)의 사상과 합쳐져 노장사상, 혹은 도가(道家)를 탄생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초나라 고현이란 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주나라에서 장서를 관리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도덕경(道德經)때문이기도 하였으나 중국 최고의 성인(聖人)으로 알려진 공자(孔子)가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공자는 백이와 숙제에 관해서는 의(義)와 인(仁)을 쫓았고 그로 인해 죽음을 거부하지 않은 인물로 높게 평가했다. 한편 사마천은 어질지 못한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이는 마치 맹자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부귀의 중요함을 일찍이 알고 있었는데 만약 부귀를 얻을 수 있으면 말채찍을 잡는 마부라고 하겠
사마천은 사기에서 72개의 열전을 지었는데 그중에서 지금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공자는 백이와 숙제에 대해 인(仁)을 행한 의인으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높은 인품의 상징으로 치켜 세운다. 그러나 사마천은 공자의 이러한 시각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평가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마천의 시기에
여불위와 진시황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도 소설, 영화, 드라마의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워낙 은밀한 이야기여서 아직도 그 실체에 대해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성적 호기심으로 여불위가 진시황의 친부라고 믿고 싶어 하기도 한다.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은 진시황의 공식적인 아버지인 자초와 여불위가 데리고 있
중국 역사에서 몇 명의 유명한 상인들이 있다. 범려는 월나라의 재상으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이후 은퇴하여 장사로 성공하여 상인들의 성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전국 시기 말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으니 바로 여불위(呂不韋)였다. 여불위는 기원전 292년에 태어나 235년에 죽었는데 원래 위나라 사람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였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