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7월 소련 다음으로 중국에 공산당이 만들어졌다. 이 당시에 중국은 지식인들이 1차세계 대전 이후 서방 세계에 대해 실망을 하였고 그 대안으로 받아들인 것이 공산당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여 공산당과 모택동 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의 언론매체들은 최근 공산당을 중심으로 중국이 하나가 되어야
중국을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 쥐어 있는 중국 돈에는 딱 한 사람의 인물화만 볼 수 있다. 바로 모택동이다. 그리고 중국의 수도 북경의 천안문 광장 벽에 걸린 초상화의 인물 역시 모택동이다. 중국에서 택시를 타면 어렵지 않게 모택동이 마치 기독교의 십자가 혹은 예수님의 초상처럼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택동 도대체 그는 누구이기에 중국인의 마음속
지난 6월 11일에서 13일까지 영국의 남서부에 있는 휴양지 카비스 베이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G7은 원래 G5로 시작되었는데 1971년 미국이 금태환을 중지한 이후 미국의 재무장관이던 조지 슐츠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장관에게 만나자고 제의하면서 첫 단추가 끼워졌다. 이후 1975년에 프랑스의 랑부이에에서 이탈리아를 참여시
‘일변도(一邊倒)’라고 하는 단어는 한쪽으로 치우치다 혹은 한쪽으로 경도된다는 뜻이다. 1945년 8월에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으나 국제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이 갈라서면서 전쟁 후 유럽에는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길게 드리워졌다. 베를린에
오래전의 기억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중국의 심양에 있는 자매대학을 방문하였고 그 일정중에 단동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심양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가다 만난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중국쪽에는 단동이 있고 북한쪽에는 신의주가 있다. 단동과 신의주 사이의 압록강에서 두 개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하나는 단교(斷橋)라고 해서 끊어진 다리가 딱 압록강의 중간까지 이어져
모택동이 중국에서 장개석을 몰아낸 후 대륙 곳곳에 남아있던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몰아내고 자신의 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급급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과 국경을 맞닿고 있던 한반도의 상황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인 1949년 6월 주한미군을 철수시켰고, 다음해인 1950년 1월 국무장관이던 애치슨은 2차세계대전 이후 극동지
장개석이 타이완으로 임시정부를 세운 후 국민당은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 후 중화민국은 타이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던 중화민국은 ‘자유 중국’이라고도 했으나 지금의 국제사회에서는 타이완이라는 이름으로 국제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자신들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
장개석이 비록 모택동에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국민당 정부를 이전하였으나 한국과의 유대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45년 11월 장개석은 자신의 부인인 송미령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에서 한국으로 귀환하려는 김구 선생을 초대했다. 이 전별식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한국 독립당 간부와 각계의 요인 2백명을 초대했고 당시 미화 20만달러를 김구에게 전달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에 붉은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의 정계와 학계에서는 한탄이 터져나왔다. “우리는 중국을 잃어 버렸다(We lost China)”란 말로 당시 미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막 시작된 냉전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토와 역사와 인구를 가진 중국을 공산주의 진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전략에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원래 미국
1945년에 접어들면서 세계 곳곳에서 피를 뿌린 잔혹한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해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장개석이 이끌던 중화민국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마지막까지 그 야욕을 버리지 않고 저항하였다. 결국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탄인 원자폭탄을
지난 9일 출범 1주년을 맞이한 평택시문화재단을 방문해 ‘김혜연 문화교류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날 인터뷰에서 김혜연 팀장은 “지역 내 예술인들이 창작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연구함과 동시에 평택시민들이 문화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게끔 시민과 예술인의 플랫폼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며 문화교류 팀장으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앞서 김혜
태평양 전쟁은 크게 보면 2차 세계대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아시아 지역에서의 전쟁을 따로 부르는 명칭이다. 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히틀러가 1939년 9월 1일 폴란드의 서쪽 지역을 침략하면서 그 전쟁의 도화선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1937년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그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국가들은 연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이후 그 야욕을 멈추지 않고 중국으로 확대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을 했고 유럽의 제국주의와 같이 아시아에서도 자신의 제국인 대동아 공영권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선을 따라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 1931년 9월 18일을 기점으로 만주사변을
1992년 8월 23일에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여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해지자 많은 한국의 기업인들과 장사하는 사람들이 초기에는 심양(瀋陽)으로 많이 진출했다. 심양이 가지는 지리적 특징은 중국의 동북3성인 랴오닝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진출하는 통로의 역할을 했고 동시에 동포들이 많이 살아 언어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심
평택시는 ‘환경정책 시민인식 여론조사’를 추진했다. 그 결과 평택시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환경정책은 ▲쓰레기 처리폐기물 정책 ▲미세먼지 저감 정책인 것으로 나타났다.이번 ‘시민인식 여론조사’는 조사기관 ㈜조원씨앤아이에서 지난 13일과 14일 양일에 걸쳐 진행했으며, 평택시에 거주하는 만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유선RDD ▲무선RDD 기반 D
중국의 붉은 별은 타임즈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책의 저자는 에드가 스노우란 사람으로 1927년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지방 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28년 상하이로 건너와 차이나 위클리의 부편집장을 역임했다. 또한 북경대학에서 강의도 하였고 미국과 영국의 잡지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2년 중국에
중국 공산당이 모택동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지금도 칭송하고 있지만 사실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복잡하다. 모택동이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인물중의 하나이고 중국에서 국민당의 장개석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그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후 모택동이 죽기 전까지 중국 인민들은 모택동의 잘못된 정책과 그의 권력욕에 많은 희생과 절망을
영국의 역사가이면서 정치인이었던 액턴(Acton)은 “권력은 부패하게 되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라는 명언을 남겼다. 절대 권력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에 따라 미국은 독립하면서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3권분립을 하여 권력간에 서로 ‘견제와
이번 주에는 중국이 코로나 시기에 개최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회의를 합쳐서 부르는 양회가 시작된다. 중국의 최대 정치 행사라고 할 수 있는 2021년도 13기 4차 전국인민대표대회는 5일에 개최되고 그 전날 정치협상회의가 열린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중국에서 형식상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헌법 수정과 국가의 중요한 지도자를 선출한다. 국가
타이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중정기념당이다. 타이완의 수도 타이페이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중정기념당은 장개석이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패배한 이후 타이완에 중화민국을 수립했는데 그가 죽은 후 중정기념당을 만들었다. 광대한 부지와 엄청난 대리석을 사용해서 만든 이곳은 세계의 많은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기념당의 주인공인 장개석은 청나라 말기에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