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는 등소평에 의해 이미 낙점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권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특별한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중국에서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부모의 후광이 상당히 중요했으나 그는 이 부분에서는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후에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을 대거 등용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다. 후진타오 이전의 등소평과 강택민은 성
후진타오는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의 뒤를 잇는 제4세대 지도자이다. 그의 조상은 원래 황산이 있는 안휘성 출신으로 장사에 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조상은 강소성까지 진출하여 차를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였고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아버지는 당시 엘리트로 학교 교사를 지냈고 어머니 역시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교사였다. 이
“젊은 예술인들은 예술을 펼칠 공간이, 시민분들은 예술을 관람할 공간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공간만 있다면 그 곳에 예술을 선보이고자 한다” (한국청년문화예술회 대표 임강유 시인)평택 출신의 청년 예술인들로 이루어진 ‘한국청년문화예술회’가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꿈을 펼치고, 많은 예술가들과 협업을 진행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전
강택민은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 그리고 권력의 가장 핵심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으면서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등소평과 공산당 원로들에게서 부여 받은 것으로 초기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권력을 잡고 처음 개최된 1992년 10월에 개최된 14차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는 등소평이 남순강화에서 발표
강택민은 양주 출신이고 그의 기본적인 정치활동의 무대는 상하이였다. 중앙에서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과 경제특구를 설립하는데 참여하면서 등소평과 공산당 원로들의 눈에 들었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1980년에서 1983년까지 상하이는 아직 개방정책의 세례를 받지 못했고 발전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시 시장은 왕도함(汪道涵)으로 임기가 다되었
중국의 개혁파의 리더는 등소평이었지만 그 밑에 있던 호요방은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민의 자유에 대해 더 많은 개방을 주장했었다. 그는 비록 중국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한편 원로들의 미움을 받았다. 그의 죽음이 촉발한 것이 바로 1989년의 6.4 천안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현재의 중국 정부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등소평이
천안문 사건은 등소평과 당시의 중국 정국을 주도하던 개혁파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비록 무력으로 진압을 하고 사회적 안정은 유지하였으나 정권 내부에서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천윈(陳雲) 등의 보수파는 천안문 사건의 배경이 궁극적으로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국민들에게 지나치게 자본주의를 개방했기 생긴 사건이라고 공격하였다. 특히 천윈의 ‘새둥지 경제론(鳥
1978년말 등소평에 의해 시작된 개혁개방과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은 세계의 주목을 끌면서 성공적으로 보였다. 서구에서는 값싼 노동력과 저렴한 제품을 만드는 중국으로 인해 물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고, 중국도 외화를 벌어들이면서 경제적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의 뒷면에는 빈부격차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씩 커져 가고
등소평이 중국에서 권력을 잡은 후 시행한 개혁정책과 개방정책이 중국과 중국인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었고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정책은 크게 ‘흑묘백묘론’과 ‘선부론(先富論)’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흑묘백묘론은 원래 자신의 고향이던 사천성 속담에 ‘흑묘황묘론’이 있는데 이를 차용해서 사용했다. 그 의미는 “검은 고양이던 하얀 고양이던
등소평이 권력을 잡은 중국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1949년에서 약 30년동안 철저한 계획과 분배의 어두운 이데올로기의 틀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등소평의 정책은 매우 간단했다. 가난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론을 완성하였다. 등소평은 국가의 목표를
본지는 지난 9일 브레인시티프로젝트금융투자를 이끌고 있는 김수우 대표와의 만남을 통해 현재 브레인시티 추진 현황 및 카이스트, 아주대병원의 성공적 유치, 그리고 향후 계획 등에 대한 김수우 대표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Q 브레인시티 추진현황을 설명하여 주세요.A 평택 브레인시티 개발사업은 수도권 최대 규모의 일반산업단지로 2019년 5월 21일 기공식을 갖고
21세기의 중국은 이전의 중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NO라고 할 수 있는 중국’, ‘할말은 하겠다는 중국’ 여러 가지 수식어가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단어를 대신하고 있다. 지금의 중국은 일본과 독일을 제치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Great of Two)국가로 성장하였다. 1992년 한중수교시의 한국을 환대하고 한국인을 좋아하던 중국
모택동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이 기회를 노린 4인방과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임표가 앞장서 있었다. 특히 임표는 국방장관에서 부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임표는 1925년에 공산당에 가입했고 장개석의 국민당이 만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국민당군에서 빠져나와 모택동의 군대에 합류했고 전투에 능해 뛰어난 사령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부터 1976년 12월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중국 전역을 휩쓸었던 정치운동의 광풍으로 중국 스스로도 십년간의 동란(動亂)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정식 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며,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권력투쟁이 주 원인이었지만 사건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1959년 말에
모택동의 이상주의적인 실험이었던 대약진이 비극적으로 끝나자 유소기와 등소평이 중국의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했다, 원래 유소기는 모택동 다음의 자리에 있었는데 1959년 4월 국가주석이 되었고 공산당내 정치국의 제 1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 것이 등소평이었다. 모택동은 2선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점차 유소기의 세력이 확대되
유소기는 대약진의 광풍이 중국 대륙을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 그 정책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모택동에게 대립의 각을 세운 인물이다 유소기는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성에서 태어났고 지금 호남성의 수도인 장사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후 1920년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 다음해인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성립될 때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1922년에 중국에 귀국
한나라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라는 역사서를 저술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으며 중국 지도자들이 대화중에 사용하는 이야기들도 사기의 내용을 많이 인용한다. 한국에서도 널리 읽히고 있으며 중국의 많은 역사와 인물,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고사성어 중에 “임금에게는 백성이 하늘이고,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다(王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세계와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고 그 관계는 미중소의 전략관계가 변화되는 1972년까지 지속되었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중국은 소련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정권을 유지하면서 중국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스탈린의 입장
모택동은 오랜 혁명 끝에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이제 자신의 이상인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하에 있던 사회 체제에 대해 대대적인 수술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서 1952년까지 2년동안 삼반운동과 오반운동을 일으켜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저항할 수 있는 세
중국의 서남쪽에 위치한 티베트(Tibet) 고원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평균 고도가 약 4,900미터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며 가장 높은 산은 해발 약 9천미터의 에베레스트 산이다. 이 티베트 고원에는 주로 유목민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기원전 2세기부터 여러 국가들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였다. 이후 송첸캄포(581~649)라는 인물이 663년에 지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