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잔인한 달이라 명명 했던가. 4월의 뒤뜰에서 조심스레 묻는다. 모른다고 나지막한 소리가 상기된 꽃들 뒤로 숨어드는 듯하다. 너뿐이 아니라 우리 모두 모르는 일이니 부끄러워하거나 수줍어하지 말고 당당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뒤숭숭한 코로나 삭풍에 가려 져 봄이 사라졌다. 왕성하게 빛나던 왕 벗 꽃잎들의 미소가 숨을 낮추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기를 잃었
친구의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그녀 특유의 걸음걸이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머리는 땅을 보고, 엉덩이는 씰룩씰룩, 다리는 팔자걸음으로 이상하고 방정맞은 자세는 어디로 가고 어느새 안정적이고 당당한 걸음으로 변하여 날고 있었다. 서서 걷는 문체처럼 멀리서 그를 알아볼 때 얼굴보다는 걸음마이다.“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여류 작가의 문장이 눈에 들어
백모단, 우주목, 벽어연, 염좌, 에케베리아 제이드 포인트, 불야성, 부용, 자려전, 청옥, 십자성, 연봉, 벨루스, 흑법사 이 많은 생소한 이름들은 요즘 새롭게 나와 함께하는 다육이식물들이다. 큰 화분들을 정리하면서 집안에 불필요한 물건들을 치우니 여백이 생겼다. 공간 배치를 다시하고 집을 서정이 넘치는 테마로 가꾸기로 했다. 지인의 집에서 용트림 늘어진
불어라 꽃바람! 부르텄던 딱지가 녹아내리도록! 꽃잎이 날아 사람들의 근심이 사라지도록! 그러나 봄이기에 초가집 앞뜰에도 기와집 뒤울안에도 꽃소식은 어김없다. 순백의 벗꽃이나, 진분홍 진달래와 복숭아꽃이나, 노란 개나리나 할 것 없이 부끄러운 얼룩빼기 나리꽃을 닮은 마음일까 궁금해진다.봄바람이 토확질을 하듯 애써 뱉어낸 목련 사이로 진갈색으로 봄의 흔적들이
튤립 꽃밭이다! 네델란드의 작은 귀퉁이를 떼어 옮겨 심은 것일까, 4월 햇빛을 그대로 받아먹고 다시 세상에 내어 비추는 꽃송이들을 본다. 고운 빛들의 상호작용! 아름다운 이 법칙은 어디에서 왔을까? 노랑, 빨강, 분홍, 자주, 주홍빛 그라데이션으로 꽃물결 일렁이는 동산, 그냥은 도저히 지나칠 수 없다. 목적이 있어 길을 가던 사람들도 시선이 멈추었다. 돌아
몸살을 앓으며 꽃을 피우는 계절, 꽃들의 기침 소리 요란하다. 봄의 8할을 잃어버린 기분에 통복천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물오른 벚꽃나무 오돌토돌 개화의 순번을 기다리고 조팝나무가지 연둣빛 새순을 밀어내며 노란개나리 봄의 송가 부르는 통복천의 봄은 곧 환희로 가득 차겠다. 집과 직장을 오가며 휴일에도 집콕 생활이 계속되어 가까운 천변의 변화마저 보는 여유를
세상에 별의 별 처방전을 다 받아 본다. 봄꽃이 한창 꿈틀 거리는 시절이건만 이를 어쩌란 말인지 참으로 난해하다. 인정은 온화한데 세월의 텃세를 받는 듯 울렁거리며 상기되는 이 시국을 어쩌란 말인지 답답하기마저 하다. 긴 겨울이 끝나고 나면 늘 상 상춘곡을 흥얼거렸다. 콧노래도 좋고 휘파람도 좋다. 그냥 나오는 대로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봄의 틈 안에 서
재랭이 고개에는 영춘화가 있다. 우수 무렵이면 해마다 여섯 잎 노란 꽃이 핀다. 앞장서서 봄을 맞이하는 별 모양의 작은 꽃은 옹벽 아래로 꽃가지를 길게 늘어 뜨려 무더기로 피어오른다. 오래 전에 이 꽃을 심어 늘어뜨리는 이 집의 주인은 누구일까? 옹벽 위의 집, 아마도 영춘화를 꼭 닮은 사람일거라, 지금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세상에 움츠린 이들의 마음에 생
함부로 살아 온 인류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 ‘아무렇게나 마구’ 마음대로 자연의 순환을 파괴하고 오염시킨 단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19를 출현시킨 자연의 역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공포의 시간도 시간이라 조금씩 소멸하는 과정에서 꽃피는 춘삼월이 왔다. 봄이 길목에 와서 살랑살랑 눈짓하던 시간이 소중하고 그립다. 계절이 가고 오는
불가능이란 늘 두껍고 어두운 장막 속에 숨겨져 있다. 그 베일을 벗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성패가 갈린다. 그러나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있어도 이루지 못한 일은 없다. 그렇듯 풀리지 않는 미션도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 해법의 키가 있기 마련이므로 관건은 그 키를 어떻게 찾느냐에 달려있다. 그 해법의 키란 철저한 사전 정보와 준비, 끝없는 집
나의 집 베란다에는 제라늄이 있어 좋았다. 어느 해 이른 봄 날 길가에서 작은 화분에 심겨진 것을 구해서 물을 주고 햇볕 드는 창에 두었더니 매년 봄 여름 가을 꽃을 피웠다. 분홍 주황 빨강빛을 피우며 지면 또 피었다. 꽃을 다 피우고 쉬는 제라늄은 잎만 무성하게 싱싱한 완벽한 모양을 갖추어 바라보면서도 행복해, 그 이파리에 손가락을 살짝 문지르면 허브향이
73세 되는 엄마 같은 둘째언니 생신을 축하 하는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나와 같은 나이의 큰딸인 조카가 정성으로 만든 음식상에 둘러앉아 오랜만에 웃음소리 담장 밖을 넘어 쟁반처럼 둥근 달빛과 어우러지는 화기애애한 시간에 맞춰 ‘사랑하는 언니의 생일 축하 합니다’ 노랫소리가 열렬하였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이 말은 세상의 순리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 첫 구절이 아직도 생생한 이유는 어린 시절 처음으로 암기방학숙제를 받아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외우고 다니던 기억이 선명해서 일까. 아니면 구절에 명시된 조상의 빛난 얼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바쁘게 살아오느라 그 의문을 놓지 못하고
건축탐구 집이란 다큐멘터리 방송이 있다. 집과 그 집을 닮은 주인의 재미있고 생기 넘치는 즐거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돋보이는 공간 디자인 곳곳, 소소한 소품들과 가구 배치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쁘고 열심히 살아 더 늦기 전, 미처 돌아보지 못한 가족과 나 자신이란 생의 온도를 오롯이 높이며 살아가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다는 사람들을 찾아 건축 전문
오래 된 가족사진 한 장을 한동안 보고 있자니 수많은 음성과 그림들이 사진위로 마구 스쳐 지나간다. 50년 전 농익은 역사가 서려있는 누이의 결혼식 날 찍은 가족사진을 접한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희망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자형께서 앨범 속에서 발췌하여 스캔한 사진 한 장을 SNS를 통해 날려 주면서 우리가족 모두는 기나긴 역사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문상을 갔었다. 회갑의 나이에 친정엄마를 잃은 해란언니는 환히 웃고 있는 영정 사진 아래서 “엄마!” 를 부르며 고아같이 흐느끼었다. 함께 문상 간 동료 나오미는 오래전 태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말없이 해란언니를 천천히 껴안으며 등을 쓰다듬는데 그녀의 몸짓과 눈망울에 고향에 둔 엄마를 그리는 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송아지 울음 같은
영종하늘도시의 한 마트에 절도 사건을 신고 받고 출동한 경찰관의 눈물이 연일 화제다. 아침과 점심을 굶어 배가 너무 고파 먹을 것을 훔쳤다는 사연에 말없이 돈 봉투를 건네고 사라진 남자의 훈훈한 미담과, 마트 주인의 배려와,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라며 눈물을 보인 경찰관의 모습을 보며 삭막하게만 보였던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오래전 보릿
출세(出世)의 증표가 금의환향(錦衣還鄕) 이었다면 오늘날의 환향은 어느 것이 그 상징적 대상이 될까 다시 생각 해 본다. 우린 지금 서울과 지방이 일일 생활권이 된 것 조차 아득히 잊고 살고 있다. 지방자치가 정착 되면서 이후 탄생한 우리 손자 세대는 너무나 생소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 한다. 70년대만 해도 지방과 서울의 격차는 극심했다. 그것은 바로 의식
회색빛 하늘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며 12월이 점등된다. 이 고요하고 쓸쓸한 적요함은 밤까지 이어진다. 화촉을 밝히는 신랑신부 예식을 보고 와서인지 적요 속 그들의 웃음이 여전히 가지런하다.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꽃과 축복의 인사를 건네는 하객들 틈에 비 내리는 거리 풍경이 배어있다.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영미 시에 끼친 영향으로 ‘시인의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성리학에 기초하여 예의를 중시하며 살아온 겨레 이다.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이란 의미는 예의가 중시되던 시대에 구태여 법으로 제재를 가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예의가 곧 법도였기 때문일 것 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서로를 배려하며 갖추어야할 덕목으로 삼강오륜을 귀감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삼강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