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녹산의 난과 황소의 난을 겪으면서 당나라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각 지역을 통치하던 절도사들이 각각 독립을 꾀하면서 당나라는 조종(弔鐘)을 울리게 되었다.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훗날 조정에 투항한 주전충은 황제의 실권을 빼앗고 자신이 그 권력을 찬탈하였다. 결국 907년 당나라 황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양(梁)나라를 세워 당나라는 완전히 역사속으로
당나라의 현종이 양귀비라는 미녀에 빠져 정사를 멀리하고 양귀비의 오빠였던 양국충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당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색을 가까이 했던 황제들의 말로는 비참하게 끝났는데 당 현종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젊을 때의 노력과 총명함은 여색에 흔들렸고 환관과 외척들의 발호로 관리는 부패했고 반면 농민은 압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기쁜 일이나 슬픈일이나 희노애락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술(酒)이다. 우리가 피로 회복제로 마시는 박카스의 어원도 사실은 술을 상징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제우스가 인간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 여인이 제우스에게 본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여 실제의 모습에서 나오는 강렬한 빛으로 녹아버렸다. 그러나 그 여인의
중국의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눌 때 또 한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중국의 시의 신선으로 불리우는 이태백이다. 원래의 이름은 이백이었고 호는 청련거사, 자는 태백이었다. 한국에서는 이태백으로 더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한국의 노래 중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노래가 있을 만큼 당나라 시대의 한 세상을 풍미했던 이태백은 술과 달을
당태종이 죽고 아들인 고종이 아버지의 후궁인 무조를 자신의 왕비로 들였다가 그녀에 의해서 황궁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또 자신의 아들이었던 중종 이현을 폐하고 나라의 이름도 무주(武周)라 하여 무씨의 천하가 되었다. 이후 이현은 705년 측천무후가 죽고 다시 황제가 되었으나 황후와 딸 안락공주에게 독살 당했고 그의 아들 이중무를 황제로 세웠다. 이에 황친이었
중국의 역사에 보면 다양한 미녀들의 얘기가 흥미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 미녀들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하여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나라 시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인이 있는데 한명은 바로 측천무후이고 또 한명은 중국 4대 미인의 한사람인 양귀비이다. 대부분의 미녀가 황제를 미혹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하고 강성했던 시기로 ‘대당성세(大唐聖世)’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당나라 시기의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서안)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제적 도시였다. 당나라 시기에 완성된 실크로드는 로마까지 그 길이 연결되었고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등이 육로와 해상을 통해 전해졌고, 동시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병을 얻어 사망했다. 이후 막내 아들이었던 이치가 20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이치는 매우 소심하고 심약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의 후궁이었고 훗날 당나라의 왕권을 찬탈한 무(巫)씨의 권고로 황위에 올랐다. 당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처로 삼았으니 아버지의 뒤를 이은 패륜이라고 할 수 있다. 무능했던
몇 년 전 안시성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받은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시성은 단순히 영화를 넘어 한국과 중국관계의 오랜 역사를 우리들 스스로 한번쯤은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약 700년의 역사를 유지한 동북아시아에서 패권
이세민은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시킨 후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바로 당나라의 영토를 확장했던 당태종이었다. 당태종은 남북조와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의 세력과 영토를 확장하는데 그 정책의 우선 순위에 두었다.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중국이 통일 되거나 강성했을 때 호시탐탐 한반도에 대한 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수나라와 당나라
중원의 오랜 분열을 깨뜨리고 북쪽의 유목민 계열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수양제의 사치와 향락, 과도한 토목 사업과 4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여 40년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수나라 시기 북쪽에는 돌궐과 또 다른 유목민족들이 호시탐탐 중국의 국경을 넘어 약탈을 감행하고 있었고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많은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수나라의 문제는 ‘개황의 치’라고 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아들 양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양광은 황제에 오른 후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검소하고 백성들을 우선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행태를 보였다. 수문제는 중국의 남북을 잇는 운하가 필요함에도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공사를 중지하였다. 그러
한나라 이후 중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도 그 끝을 보이고 다시 통합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삼국시대부터 계산한다면 거의 사백년의 시간이 지나서다. 남북조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워진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단명한 통일 왕조이기도 하다. 남북조 시기에 북쪽의 대부분의 정권은 유목민족들에 의해 성립이 되었는데 그 중 수나라는
중원의 한족 왕조는 무능하고 내부 분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 북쪽의 유목민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한족들을 약탈하고 자신들의 정권을 세웠다. 모두 16개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데 기본적으로 한 왕조의 역사가 50년도 되지 않을 만큼 짧았다. 왕조의 끊임없는 교체와 전쟁은 이 땅에서 살고 있던 한족들이 그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전
중국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면 중국이 통일되어 부강한 경우에는 외부를 향해 팽창 정책을 실시한다. 반면에 중원이 분열되거나 약해졌을 경우에는 외부의 이민족들이 중원을 공략하는 역사적 반복을 계속해왔다. 중국 만리장성 너머의 광대한 초원지대에는 다양한 유목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에게 있어 농경생활을 하는 중국인들은 풍부한 물자의 공급지로 그 세력이 약해지면
위정자들이 권력에 눈이 멀어 백성들의 고통은 점차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역사는 시대별로 인물별로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를 담고 있지만 그 속에서 가혹하리만큼 착취당하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민중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의 말엽 일곱명의 특이한 인물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항상 죽림(竹林)에서 서로들 모였는데 후대에 이들을 가리켜 ‘죽림칠현’이라고 불
삼국지 중반부터 등장했던 사마의(司馬懿)의 자식들이 위나라의 권력을 찬탈하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다시 손자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으니 그 이름이 진(晋)나라이다. 진나라는 크게 서진과 동진으로 나뉘어진다. 사마의의 직계가 무너진 것은 266년에 서진을 세우고 316년에 멸망했으니 사실은 50년의 짧은 기간이었다. 이후 사마씨의 후손이 다시 지금의 남경
삼국지를 읽다보면 제갈량이 상대방을 통쾌하게 이기지 못하는 장면들이 나올 때 마다 마음을 졸이곤 하는데, 그 대상이 위나라의 책사 사마의(司馬懿)였다. 그는 신출귀몰한 제갈량의 전법을 꿰뚫어 볼 줄 알았고, 최소한 제갈량을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않는 묘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삼국지나 후세 사람들이 제갈량만 인정하고 사마의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지난 21일 경기 꿈의학교 안성 꿈의학교에서 성장나눔발표회를 개최해 1년여 간의 성과를 공개하는 자리를 가졌다. 안성맞춤 아트홀에서 진행된 성장나눔발표회에는 올해 안성에서 개최된 20여 곳 이상의 다양한 꿈의학교들이 모여 부스를 통해 해당 꿈의학교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올해 꿈의학교에 참여한 학생들과 현장을 방문한 시민들 모두 꿈의학교에 대해 알
삼국지의 주인공들, 조조, 유비, 손권이라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손권은 당시 가장 남쪽 지역에 자리잡은 오(吳)나라에 세력을 두고 있었다. 오나라는 중국의 양자강 남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손권은 위, 촉, 오의 세명의 인물들 중 가장 오랫동안 살았는데 삼국지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일들이 그의 생애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적벽대전에서 조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