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눌 때 또 한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중국의 시의 신선으로 불리우는 이태백이다. 원래의 이름은 이백이었고 호는 청련거사, 자는 태백이었다. 한국에서는 이태백으로 더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한국의 노래 중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노래가 있을 만큼 당나라 시대의 한 세상을 풍미했던 이태백은 술과 달을
당태종이 죽고 아들인 고종이 아버지의 후궁인 무조를 자신의 왕비로 들였다가 그녀에 의해서 황궁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또 자신의 아들이었던 중종 이현을 폐하고 나라의 이름도 무주(武周)라 하여 무씨의 천하가 되었다. 이후 이현은 705년 측천무후가 죽고 다시 황제가 되었으나 황후와 딸 안락공주에게 독살 당했고 그의 아들 이중무를 황제로 세웠다. 이에 황친이었
중국의 역사에 보면 다양한 미녀들의 얘기가 흥미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 미녀들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하여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나라 시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인이 있는데 한명은 바로 측천무후이고 또 한명은 중국 4대 미인의 한사람인 양귀비이다. 대부분의 미녀가 황제를 미혹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하고 강성했던 시기로 ‘대당성세(大唐聖世)’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당나라 시기의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서안)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제적 도시였다. 당나라 시기에 완성된 실크로드는 로마까지 그 길이 연결되었고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등이 육로와 해상을 통해 전해졌고, 동시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병을 얻어 사망했다. 이후 막내 아들이었던 이치가 20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이치는 매우 소심하고 심약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의 후궁이었고 훗날 당나라의 왕권을 찬탈한 무(巫)씨의 권고로 황위에 올랐다. 당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처로 삼았으니 아버지의 뒤를 이은 패륜이라고 할 수 있다. 무능했던
몇 년 전 안시성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받은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시성은 단순히 영화를 넘어 한국과 중국관계의 오랜 역사를 우리들 스스로 한번쯤은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약 700년의 역사를 유지한 동북아시아에서 패권
이세민은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시킨 후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바로 당나라의 영토를 확장했던 당태종이었다. 당태종은 남북조와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의 세력과 영토를 확장하는데 그 정책의 우선 순위에 두었다.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중국이 통일 되거나 강성했을 때 호시탐탐 한반도에 대한 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수나라와 당나라
중원의 오랜 분열을 깨뜨리고 북쪽의 유목민 계열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수양제의 사치와 향락, 과도한 토목 사업과 4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여 40년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수나라 시기 북쪽에는 돌궐과 또 다른 유목민족들이 호시탐탐 중국의 국경을 넘어 약탈을 감행하고 있었고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많은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수나라의 문제는 ‘개황의 치’라고 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그의 아들 양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양광은 황제에 오른 후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검소하고 백성들을 우선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행태를 보였다. 수문제는 중국의 남북을 잇는 운하가 필요함에도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공사를 중지하였다. 그러
한나라 이후 중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도 그 끝을 보이고 다시 통합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삼국시대부터 계산한다면 거의 사백년의 시간이 지나서다. 남북조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워진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단명한 통일 왕조이기도 하다. 남북조 시기에 북쪽의 대부분의 정권은 유목민족들에 의해 성립이 되었는데 그 중 수나라는
중원의 한족 왕조는 무능하고 내부 분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 북쪽의 유목민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한족들을 약탈하고 자신들의 정권을 세웠다. 모두 16개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데 기본적으로 한 왕조의 역사가 50년도 되지 않을 만큼 짧았다. 왕조의 끊임없는 교체와 전쟁은 이 땅에서 살고 있던 한족들이 그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전
중국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면 중국이 통일되어 부강한 경우에는 외부를 향해 팽창 정책을 실시한다. 반면에 중원이 분열되거나 약해졌을 경우에는 외부의 이민족들이 중원을 공략하는 역사적 반복을 계속해왔다. 중국 만리장성 너머의 광대한 초원지대에는 다양한 유목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에게 있어 농경생활을 하는 중국인들은 풍부한 물자의 공급지로 그 세력이 약해지면
위정자들이 권력에 눈이 멀어 백성들의 고통은 점차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역사는 시대별로 인물별로 그들의 영웅적인 행위를 담고 있지만 그 속에서 가혹하리만큼 착취당하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민중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의 말엽 일곱명의 특이한 인물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항상 죽림(竹林)에서 서로들 모였는데 후대에 이들을 가리켜 ‘죽림칠현’이라고 불
삼국지 중반부터 등장했던 사마의(司馬懿)의 자식들이 위나라의 권력을 찬탈하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다시 손자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으니 그 이름이 진(晋)나라이다. 진나라는 크게 서진과 동진으로 나뉘어진다. 사마의의 직계가 무너진 것은 266년에 서진을 세우고 316년에 멸망했으니 사실은 50년의 짧은 기간이었다. 이후 사마씨의 후손이 다시 지금의 남경
삼국지를 읽다보면 제갈량이 상대방을 통쾌하게 이기지 못하는 장면들이 나올 때 마다 마음을 졸이곤 하는데, 그 대상이 위나라의 책사 사마의(司馬懿)였다. 그는 신출귀몰한 제갈량의 전법을 꿰뚫어 볼 줄 알았고, 최소한 제갈량을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않는 묘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삼국지나 후세 사람들이 제갈량만 인정하고 사마의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지난 21일 경기 꿈의학교 안성 꿈의학교에서 성장나눔발표회를 개최해 1년여 간의 성과를 공개하는 자리를 가졌다. 안성맞춤 아트홀에서 진행된 성장나눔발표회에는 올해 안성에서 개최된 20여 곳 이상의 다양한 꿈의학교들이 모여 부스를 통해 해당 꿈의학교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올해 꿈의학교에 참여한 학생들과 현장을 방문한 시민들 모두 꿈의학교에 대해 알
삼국지의 주인공들, 조조, 유비, 손권이라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손권은 당시 가장 남쪽 지역에 자리잡은 오(吳)나라에 세력을 두고 있었다. 오나라는 중국의 양자강 남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손권은 위, 촉, 오의 세명의 인물들 중 가장 오랫동안 살았는데 삼국지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일들이 그의 생애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한(漢)나라의 운명이 다해갈 때 도처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특히 황건적(黃巾賊)은 그 세력을 더해가고 있었고 왕실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곳곳에서 군대를 만들어 대항하고 있었다. 유비(161-223)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들이
나관중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曹操)는 간웅으로 악당의 수괴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의 경극 중에는 심지어 조조를 죽이는 장면이 있을 정도였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한나라 황제의 성이 유(劉)씨였으므로 당연히 유비에게 더 인간적으로 끌렸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유비는 한나라의 왕실과 같은 혈연으로 취급하여 황실을 복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아쉬움
한나라가 서한에서 동한으로 옮긴 후 점차 국력이 기울고 있었다. 황제는 무능하고 환관이 권력을 휘두르고 조정은 부패하여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였다. 이러한 고통은 농민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반란이 황건적(黃巾賊)의 난이었다.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는 옛 이야기처럼 삼국지는 동한 말엽에서 삼국을 통일한 진(晋)나라 초기까지 약 100년의 역사를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