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흥기는 지배세력이던 만주족에게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청조를 지탱하고 있던 한족 사대부 계층에게도 강한 충격을 주었다. 지배층이던 만주족에게는 정권 위협의 측면에서 충격이었던 반면 한족 지배층에게는 반유교적인 신앙의 측면에서 강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청나라의 군사는 만주족으로 구성된 약 20만 명의 팔기군과 한족으로 구성된 60만의 녹영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팔기군은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태평성대를 겪으면서 점차 부패하기 시작하여 전투력이 약해지고 있었고, 그 틈을 녹영군이 파고 들어가 청나라의 주력군
홍슈취안이 이끄는 태평천국군은 양자강 이남 지역을 점령하고, ‘난징(南京)’을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의미의 ‘천경(天京)’으로 개명한 후 수도로 삼았다. 이를 통해 태평천국은 기본적인 국가체제를 구축했다. 태평천국 내의 생활은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와 기율에 근거하고 있었다. 남성은 술, 담배, 아편, 변발을 금지했으며, 여성에게는 전족 금지와 함께 전투 참여 및 관직 진출의 기회가 주어졌다. 남녀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남녀평등 정책을 시행했다. 태평천국군이 아닌 점령지의 백성을 대하는 데에도 엄격한 기율이 적용되어 일반 백성에 대
홍슈취안은 종교적 신념에서 시작하여 상제교의 교리를 널리 전파했다. 그의 굳은 신앙은 때때로 배타적이거나 배제적인 태도를 낳았고, 그는 기독교의 교리를 따라 우상을 파괴하고 개종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은 유교 전통에 따라 살아온 현지인들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이 충돌은 홍슈취안이 당시 주류 사상인 유교와 대립하며 반체제적 경로를 걷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홍슈취안은 역사상 왕조들이 지속적으로 통치이념으로 삼은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비판했다. 천명사상은 황제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로보아,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인간
홍슈취안은 성경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발췌하여 편집한《권세양언》을 통해 기독교를 파악했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 교리를 단편적으로만 이해했다. 또한, 그의 환몽 경험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유도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홍슈취안은 자신이 상제의 명을 받아 세상의 악을 제거하고 상제 신앙으로 개종하여 구원할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믿음은 당시 중국 사회의 현실과 밀접하게 맞아떨어졌다. 중국 사회는 불평등과 부패가 만연해 있었고, 특히 아편중독이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퍼져 있어사회가 극도로 타락한 상황으로 보였
홍슈취안이 기독교 사상을 처음 만난 건 22살이 되던 1836년이다. 과거시험을 보러 광저우로 갔다가 시험에 떨어진 뒤, 중국인 최초 목사인 양아발(梁亞發)이 편집해서 만든《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권세양언》은 성경의 내용을 중국인 전도 목적으로 요약한 책으로, “세상에 주는 복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홍슈취안은 기독교와의 첫 만남에서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그러다 1837년에 과거시험에 또 실패한 후 40일 동안 병상에 있으면서 기이한 꿈을 꾸고 환상을 보게 되었다. 홍슈취안은 꿈속에서 하늘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1851-1864)은 그 뒤를 이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 홍슈취안(洪秀全, 1814-1864)은 기독교 사상에 영감을 받아 하나님을 숭배하는 ‘배상제회(拜上帝會)’를 만들었고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하려는 목표로 민중운동을 주도했다.그는 1814년 광저우 화현(花縣)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는 객가(客家, hakka)출신으로 광둥성 동쪽의 자잉주(嘉應州)에서 서쪽 화현으로 이주한 가문이었다. 객가는 중원의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중국 사회는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가지 불안 요소를 품고 있었다. 먼저, 경제 기반이 농업인 사회에서 대다수의 토지가 소수의 지주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땅을 가지지 못한 농민인 소작인의 증가를 의미한다. 소작인은 지주의 땅을 빌려 삶을 영위해야 하므로, 소작인의 증가는 소작인 간의 과열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이 경쟁에서 뒤처진 소작인은 쉽게 사회의 반항 세력으로 변할 수 있다.인구의 증가에 따른 경작지의 정체 현상도 문제를 가중시킨 한 요인이 되었다.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친 130여
아편전쟁 결과 체결된 난징조약(1842년)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열강의 중국 진출 상황은 식민지적 지배와 개입을 심화시켰다. 난징조약의 체결로 영국은 숙원이던 거점지를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더 큰 문제는 홍콩이 영국의 중국 내 무역 거점인 동시에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는 것이었다. 아편전쟁을 통해서 영국의 화력을 경험한 청나라에게 홍콩에 상시 주둔하는 영국군은 위협 그 자체였다. 영국은 이러한 무력적 배경을 등에 업은 채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새롭게 개항된 5개 항구에서 합법적인 무역과 동시에 불법적인 거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그 결과 영국의 승리로 1842년에 불평등한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난징조약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보완하기 위해 영국은 1843년 7월에 ‘5구통상장정(五口通商章程)’과 같은 해 10월에 ‘후먼조약(虎門條約)’의 체결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영국은 관세율을 5%로 고정시키는데 성공했고, 영사재판권과 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 다른 나라에게 새로운 특혜를 부여할 때는 즉각 동일한 특혜를 받는다)를 얻어냈으며, 외국인이 개항지에서 자유롭게 건축할 수 있는 권한도 갖게 되었다.난징조약의 체결은 청나라가 전통적
19세기 초,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중국에 밀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 내에서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일으켰고, 청나라 정부는 아편의 해악을 줄이기 위해 아편의 수입과 사용을 금지했다. 1839년에 대표적 아편 엄금론자인 린쩌쉬(林則徐)가 광저우에서 아편을 대량 압수하고 파기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은 영국과의 갈등을 촉발시켰다.영국은 중국의 아편 금지 조치에 대응하여 1840년 6월에 군사적 행동을 취하였다. 이 전쟁을 영국은 ‘제1차 중영전쟁(First Sino-Br
아편을 판매하던 영국 상인들은 린쩌쉬의 정책으로 아편을 몰수당하자 광저우를 떠나 마카오로 가는 길에 홍콩에 수일간 머물렀다. 그런데 이 기간에 영국인이 청나라 농민 임유희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린쩌쉬는 범죄인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엘리어트가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와 영국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엘리어트는 홍콩을 떠나 마카오에 거주하고자 하였으나 청과 포르투갈의 반대로 부득이하게 해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엘리어트는 이러한 상황을 영국 정부에 알리고청국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영국과 중국 두 나라의
린쩌쉬는 도광제의 전적인 신임을 얻고 아편에 대한 엄금 정책을 강력하게 실행하였다. 대내적으로는 흡음자에 대한 처벌 강화에 중점을 두었고, 대외적으로는 외국 상인이 소지하고 있는 아편 전량 제출과 이후에도 아편을 중국에 들여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약서 제출을 요구하였다.1839년 3월에 부임한 린쩌쉬는 흡음자에 대해 철저한 단속을 실시한 결과, 같은 해 12월에 아편 흡음으로 감옥에 수감된 자가 2천 명 이상에 달했고, 이 중에서 하루에 3~4명이 아편의 금단현상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아편을 팔다 적발된 판매자는 이관(夷館
1838년 9월, 린쩌쉬는 다시 도광제에게 아편이 매우 해로우므로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며, 아편 수입이 군대의 붕괴와 재정의 고갈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한 도광제는 마침내 엄금론파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도광제는 1838년 12월 31일 린쩌쉬를 흠차대신(欽差大臣, 황제의 칙명을 받은 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을 조사하고 금지하기 위해 광저우로 파견하였다. 린쩌쉬가 광저우에 도착한 1839년 3월 10일은 아편 밀수에 대한 반감이 심하고 아편 흡음을 중단하라는 요구가 높았던 시기였다.린쩌쉬가 광저우에 도착한 후, 양광
19세기에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아편 무역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했다. 아편의 확산은 사회 질서와 도덕성의 문제로 여겨졌고, 정부의 통제력 약화를 초래했다. 이에 따라 아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청나라는 아편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는 크게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으로 대별된다. 느슨한 통제를 의미하는 이금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황실의 의전을 주관하는 관청인 태상시(太常寺)의 소경(少卿, 정4품에 해당) 쉬나이지(許乃濟)이다. 쉬나이지는 부패
청 정부의 아편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지방무역상인으로부터 중국으로 밀수되는 아편의 유입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사회와 경제적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광둥체제 시기에 외국 상인이 청나라와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銀)으로 거래해야 했다. 아편이 유입되기 전에는 중국이 무역흑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유입되는 은의 양이 대폭 증가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회에 경제호황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편의 밀수가 증가하면서 무역의 역조현상이 일어났고, 중국에 유입된 은은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은의 유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중국과 무역을 시작한 1713년 이후부터 무역흑자를 가져간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무역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아편을 밀수하기 시작했다. 청나라는 당시에도 아편무역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청 정부는 1729년(옹정 7년)에 개인이 아편을 마시거나 피우는 것을 금지하였고, 이러한 흡음 장소의 개설도 금지시켰다. 1796년(가경 1년)에는 외국 아편의 유입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심지어 아편 자체를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밀수조직과 부패한 청나라 관리의 결탁으로 아편 유입량은 점점 더 증가하였다. 영국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1713년 중국과 무역을 시작한 이후부터 무역흑자를 가져간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산업자본가와 자유무역상인은 동인도회사가 중국 시장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불공정함을 호소했고, 자유로운 무역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독점권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대중 무역적자 해결과 통상항구 확대를 위해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영국은 세 번에 걸쳐 청나라에 사절단을파견하였다. 첫 번째는 1793년(건륭 58년) 조지 매카트니(G. Macartney)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이 청나라와
‘일구통상’ 즉 ‘광둥체제(Canton System)’는 주로 중국이 1757년부터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85년 동안 외국 상인들이 광저우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시행한 정책을 의미한다.역사적으로 광저우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일구통상 정책이 실시되었다. 첫 번째는 명나라 시기인 1523년부터 1566년까지 43년 동안, 두 번째는 청나라 초기인 1655년부터 1684년까지 29년 동안, 세 번째는 1757년부터 1842년 난징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85년 동안 이루어졌다.광둥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었던 영국은 무역
한때 동아시아는 유럽 사람들에게 이상향의 세계였다. 동방의 어딘가에 황금의 나라인 엘도라도(Eldorado)라는 낙원이 있을 것이라고 동경하기도 했고, 또 그곳에는 후추와 계피 같은 향신료의 군락지가 있어 자유롭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동경과 믿음이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구 사람들을 대항해의 모험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게 하는 ‘지리상의 발견(Geographical Discovery)’으로 이어졌다. 대항해의 성공으로 지중해 중심의 무역이 대서양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중국을 통치하는 황제의 권위는 중국 전역은 물론 주변 국가와의 관계도 포함하였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중국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방면에서 어떠한 교류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국가는 오로지 중국의 방식에 따라야만 했다. 무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국가만이 중국과의 무역이 허용되었는데 이를 ‘조공무역(朝貢貿易)’이라고 한다. 조공무역은 조공과 무역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조공은 조공국인 조선, 류큐(琉球), 베트남 등의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면 황제는 그 댓가